<특집_ 제9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작품론>
높고 외롭고 간절한 피는*, 피는 꽃
장석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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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숙자 론이 아니다. 정숙자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의 비평문도 아니다. 나는 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독서 노트이자 시집에 대한 나의 찬탄이다.
* 「십 년 후의 메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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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계단」에 빠진다. 시집의 제목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제목의 절반이 놓여 있다. 오르내릴 수 없는 계단. 정숙자가 설치한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며,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하지 않는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전/후진' 할 수 없다. 피로 빚어낸 계단 너머로 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및 급류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숙자의 시가 던진 질문. 시집을 다 읽어도 해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애당초 답 같은 것은 없었다. 출렁이는 계단을 뚫고 들어간다. 계단에 질식한다. 시집에서 나온 후 외젠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들끓는 힘이여.
"넘어서라… 넘어서라… 되짚는다/ 슬픔은/ 나를/ 넘어서라고" 외치는 열광과 의지여. 슬픔에 포박당하지 않기 위해 '나'가 장전한 무기는 명령이다. 주체가 슬픔에게 명한다. 명령을 수행할 주체는 슬픔이고, 명령한 자는 대상이 된다. 이 전도가 실행될 리 없다. 슬픔은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슬픔이 '나'를 이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시인이 말한다. "슬픔을/ 빠져나가라… 빠져나가라… (……)/ 절대로/ 나에게 걸려들어선 안 된다". 지금 빠져나가지 않으면, 슬픔을 박살내리라. 정숙자가 아직 발설하지 않은 말이다. '이겼다'고 선언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시인을 이길 수 없다. 정숙자의 '나'는 "나에게서 떠나/ 나에게서 얻은 틈으로/ 나를 돌아보지 말(「슬픔은 울어주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명령한다. 정숙자는 '이미' 이긴 자이기에 '이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슬픔을 제압한 것이 아니다. '나'는 슬픔과 하나이고, '나'의 안에서 슬픔은 '나'의 심장박동이다. 슬픔은 '나'의 과거를 먹어치웠다. 액체계단이 '그'를 삼켰다. 액체계단에 지금도 피가 흘러내린다. 슬픔은 수직과 수평을 교호하는 액체계단처럼, 몸속의 뼈처럼, '나'의 생명이 되었다. '나'는 슬픔의 안팎을 아우르는 자가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슬픔에게 명령할 수 없다.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지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고, (……)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살아남은 니체들」부분
시집 제목의 나머지 절반이 채워졌다. 완성된 제목은 이 작품에 이르러 "불/길"로 쪼개진다. 여기에 '불'과 '길'이 있다. 정숙자는 '불길'을 분할한다. 아니, 분단시켰다. 칼을 휘둘러 '불길'을 '불'과 '길'로 가르는 힘. 번개가 갈라놓은 '불/길', 번개처럼 금이 간 시의 얼굴에 '불길'이 서린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아니다. 사라졌던 주체의 부활이다. 수식어 '살아남은'의 의도가 이것이 아닐까. 시인은 1연에서, 3연에서, 5연에서, 7연에서 "불/길"을 반복한다. 1연은 '불의 길'로, 3연은 '불길不吉'로, 5연은 앞의 둘을 결합한 의미로, 마지막 연은 세차게 타오르는 '화염'으로 전이되는 과정. '나'는 "삶이란 견딤"을 통과하는 중이다. '견인불발堅忍不拔'은 상투어구일지도 모른다. 정숙자는 삶의 투쟁이 길어올린 의지를 되뇌인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이 보인다. 불꽃과 독백과 산맥이 일치된다. 불꽃 독백으로 일군 산맥. 니체가 그러했다. 살아남아 귀환한 '정숙자-니체'가 결집시킨 시집.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시의 불꽃이 '되는' 사람. 복수複數 주체 '들'로 재탄생한 시인.
뱀이 기어온다. 「과잉곡선」이 스멀거린다. "엑스레이 찍는다면 이를 데 없이 촘촘한,/ 무수한,/ 질서 정연한,/ 뼈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미세한,/ 가시들을 보여 주겠지/ 바로 거기서 과잉곡선의 슬픔이 밝혀지겠지". 사과, 이브, 뱀, 신의 아들, 인간 그리고 시인. 정연하고 미세한 뼈, 가시 같은 골격을 지닌 뱀이, 온몸으로 둥글게 둥글게, 호弧와 호弧 사이를 건너뛰며, 시선과 시선 사이를 비약하며, "흠잡을 데 없는 미끈함"을 시현한 몸으로, 시의 육체로 변신하기 위해 다가온다. '정숙자-뱀'이 말한다. "신이 틔운 피가 어쩌다 독"이 되었느냐고. 지금 이곳은 낙원이 아니지만, 시인이 강림한 곳이 되었다고. 신의 거짓말이 아니라 시인의 진실이 '말씀'이 되고 있는 곳이라고. 신에게는 지옥이지만, 우리에게는 낙원이라고 그녀가 말한다. 시의 낙토樂土에 "매듭 없는 물결들"과 "뒤엉킨 머리들"이 가득하다. 그것이 언어와 사람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시가 사라진 곳,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예토穢土에 정숙자가 있다. '시인-뱀'은 "허공마저 물어뜯고 옥죄"며 전진한다. 뱀이 균열을 일으키면서 멀어진다. 뱀이라는 시 또는 균열.
물이 든 유리병을 공중에 심었다
유리병에선 곧 뿌리가 나고 이파리도 나풀거릴 것이다
(……)
빗방울 소리가… 빗방울 소리가… 빗방울 소리가… 유리병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주름진 사막의 심층부까지 콸콸… 콸콸… 콸콸… 콸콸… 물길을 열어 휘파람새, 찌르레기, 버섯류들도 되살려 내고는 한다.
균열은 신과 인간의 시공간 통로
간절한 포옹,
비극보다 깊은 밀애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죽음을 견딜 수도 있는 것이다
-「균열」부분
정숙자의 시는 모던 메탈(modern metal)이다. 귀가 아니라 뼈로 감지하는 뜨거운 음악이다. 쿵쾅거리는 심장. 북소리 돌진한다. 이 내연기관이 산출하는 동력이 '나-모터헤드(motorhead)'를 움직이게 한다.
공중의 유리병에서 식물이 지상으로 손을 뻗는다. 뿌리가 유리에 금을 만든다. "성층권 너머 유리병 하나"는 "내 수호신의 하늘"에 시인이 던진 것. 그 '유리병-식물'이 비를 선사한다. 땅에 닿는 비. 땅을 안으려는 비. 빗소리가 만물을 되살린다. 빗방울, 빈 곳을 물의 몸이 되게 하고, 비 내리는 천지, 어머니의 자궁 같고, 비가 거주하는 곳, 우리가 머물던 어머니의 몸속, 우리를 담아 키우던 따스한 작은 바다 같은 빗방울 방울마다 생명이 들어찬다. 빗방울 지나간 자리, 하늘과 땅 사이, 빗방울의 공간에 들어찬 정숙자의 시선, 그 균열. 앞의 시에 사용된 '/' 역시 균열을 지시하는 기호일 것이다. 정숙자가 발원하는 "간절한 포옹". 균열 후의 포옹, 포옹 다음의 균열. 이것이 "비극보다 깊은 밀애"이다. 이러한 사랑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죽음을 견딜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사랑 앞에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끼익 렌즈에 잡힌 빨간 운동화
갑작스런 스크레치에 지느러미가 긁혔다
(……)
경쾌 발랄 순식간에 계단이 접힌다
(……)
오고 가고 밀리고 뒤섞이는 거리에서도
즉 각 즉 각 방향을 트는 감각은
산호 숲 총총 따 담은 촉각
소녀야… 소녀야…
흐르는 건 계단이 골목이 그늘이
바람이 아니라 우리였구나
한 켤레 샐비어야 금빛 붕어야 열대우림…
절대 무림을… 그렇게만 날거라
환상도 앞지르는 소년, 소녀야
-「풍크툼, 풍크툼」부분
시인을 찌른 것. 시인의 가슴에, 마음에 구멍을 낸 것. 시인의 눈동자를 뚫고 들어온 빛의 칼날. "렌즈에 잡힌 빨간 운동화"를 신은 소녀. '나'는 "갑작스런 스크레치"를 경험한다. 그 긁힌 곳에서 "지느러미"가 생긴다. 빨간 운동화가 균열을 일으킨다. '나'의 안면이 생성된다. '나'는 경험하는 주체이고, '나'의 얼굴은 이미지의 거주지이다. '나'의 감각은 "즉 각 즉 각" 세계를 인식하는 '뿔角- 안테나'를 장착한다. 순식간에 거리距離를, 거리의 계단을 접어버리는 감각. 대상이 변한 것이 아니다.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인식하게 된 '나'의 탄생이다. '나'와 '우리'의 결합. '나'는 오래전부터 '너'였다. '나'는 '우리'였고, '우리'는 '나'였다. "열대우림"이 "절대 무림"으로 변환되는 과정. 기호의 치환이 아니라 실재. 시의 순간은, 풍크툼은,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실체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날개가 돋은 소년과 소녀들. 천사들. "환상을 앞지르는" 시인 정숙자,라는 바늘이 뚫어버린 구멍. 몸의 구멍. 빠져나가는 구멍. 들어오는 구멍. 확대되는, 전진하는 구멍, 구멍들. 제목이 "풍크툼, 풍크툼"인 이유이다.
2
질문한다. 정숙자를 응축하면 무엇이 되는가. 답한다. 몽돌. 시집에 살고 있는 주체 '나'의 본질, 몽돌. 정숙자가 표현한 몽돌은 이렇다. "나는 이미 유골이다." 파도와 바람에 깎이고 깎인 돌. 그것은 "골백번도 더 자실했고 골백번 도 더 타살됐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새롭게 어리석게 새롭게 어리석에 눈떴"기에 여기에 도달했다. '나'는 몽돌이다. 지금도 마모되는 중이다. 바다와 겨루는 돌, 제 몸을 갉아내어 원圓 안의 원이 되는 돌. 마침내 하나의 원圓이 될 때까지 자신을 삭제하는 돌, 그 주체. 죽음을 응결시켜 단단한 돌로 태어나는 자, 시인. 몽돌이 말한다. "유골에게 걸칠 거라곤 바람뿐/ 유골에겐 바람만이 배부를 뿐"(「몽돌」). 삶에 희생당한 자로서 정숙자가 선언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나 자신이 형틀이다/ 곧추 일어나 양팔 벌리면/ 지체 없이 열십자가 드러난다"(「객담 및」). 형틀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틀 자체가 일어선다. 십자가 기립한다. 정숙자는 십자가이다. 피가 흘러내리는 계단을 일어서는 액체계단으로 표현한 것과 상통한다. 다시 물어야 한다. 정숙자는 왜 스스로를 처형하려 하는가. 왜 죽음과 대결하는가. 그 투쟁에서 얻을 것은 무엇인가. 답은 없다. 답이 있다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가 있을 뿐이다. '나' 때문이다. '나'가 있었기에, 죄는 시작된 것이고, '나'의 죄는 죄가 아니지만, '나'에게 죄가 없었다면 '액체계단'에 도달하지 못했겠지만…
'나'의 죄는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스스로 형벌이 되는 자에게 절망은 어떤 것인가. 정숙자가 말한다. "절망도 열정이다 어떠냐 붉은 게 꽃이 아니면/ 어떠냐 푸른 게 피눈물이면! 멈추기 마라 눕지 마라/ 다시 죽지 않아도 될 세계로 직진/진입하라/ P.S. : 죽기 전에 죽어라 그리고 압도하라 체념/ 비관 따위"(「절망 추월하기」). 이것이 정숙자의 맨얼굴이다. 심장이다. 죽음이 '나'를 압살하기 전에 먼저 '나'를 살해해야 한다. 죽음이 정복자가 되기 전에, 정숙자는 죽음을 "압도"한다. 내가 발견한 시인 정숙자의 파워이다. 장쾌한 힘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미지. "안으로/ 제 안으로만 떨어뜨리는,/ 이빨 우그려/ 누그러뜨리는 흰 칼"(「칼의 눈」).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나는 굴복한다. 안으로 우그리는 힘에 전율한다. 저 세계의 타자들과 하나 되는 용광로. 나는 압도된다. "저 나무는/ 겨우내/ 잉태했다네/ 새로 태어날 자기 자신을/ 바람살… 어둠길… 얼음판… 가로지를 때/ 벼리던 칼날 녹이고 녹여 거문고 만들었다네/ 거문고 만들었다네, 공명상자 가득 그득히/ 성벽 없는 봄만을 길러… 낳고, 낳고"(「활엽수의 뇌」). 칼을 녹이는 나무. 칼을 액체로 바꾸어 칼날 같은 나뭇잎이 되게 하는 활엽수. 바람이 지나가면 거문고로 전신轉身하는 나무, 그 나무의 살들. 용융鎔融시키는 정숙자의 힘. 죽음마저 녹여 다른 무기로 치환하는 마법 "죽음은 죽은 자의 것도 남은 자의 것도 아닌/ 저 너머 존재자의 미문美文이므로"(「육식성 시」) 이 가능한 이유. 정숙자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찬란한 아름다움.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가 말이야.)
(……)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죽리,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 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꽃 속의 너트」부분
읽은 사람의 말문을 막는 시이다. 시의 긍지와 시인의 환희 앞에서 무언無言. '꽃 속의 너트'에서 '속의'가 증발하고 '꽃〓너트'가 되는 과정. '꽃이 피'가 되는 신비. 시를 쓰고 시를 읽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시를 만났기 때문이다. '꽃-너트'는 마침내 "신들이 켜 놓은 등불"이 된다.
3
정숙자가 칸트의 입으로 말한다. "생사를 다 수용한 그 말★"좋다"(「칸트 프리즈」). 시인이라서? 좋은 시를 쓰기 때문에? 아닐 것이다. 정숙자가 얻은, 도달한, 초과하는 그 무엇. 기계와 시간. "어떤 불만이나 조건도 내세움 없이 기계는 부지런히-가지런히 파를 까고 씻고 바구니에 건진다. 시간은 모처럼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순수이성과 지평-칸트 프리즈」). 영원한 기계의 시간. 시간을 거스르는 영원한 기계. 그것이 '되고' 싶은 욕망. 생명체로서 영생하겠다는 말일까. 불멸하는 생의 열락을 소유하는 것일까. 시의 불멸, 언어의 영생을 열망하는 것일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정숙자는 그 발원을 향해 여행하기 시작한다.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진화 앞에서 일생이란 턱없이 짧다
(……)
진화 앞에서 개인의 수명이란 얼마나 짧은 시도인가
진화 앞에서 개인의 수양이란 얼마나 서툰 발화인가
천년을 두고
만년을 두고
조금씩 내디디는 것
(……)
모처럼 고요에 실려 온 쪽배를 탄다
얼핏얼핏 황홀이 비쳐 든다
가끔씩 찾아와
위안을 줬던!
행복을 깎던!
내세의 전생 곁으로
-「판단력 펌핑(pumping)- 칸트 프리즈」부분
시인은 시간 여행자, 시간 조직자, 시간 창조자이다. 정숙자의 시간은 "조금씩 내디디는 것"이다. 판단력을 '펌핑'한다. 시간을 도약시킨다.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시간의 실체를 파헤친다. 언어가 시간을 흡수한다. 정숙자는 "난만히 피어오른 잿빛"으로 표현된 사람의 수명, "일백 년 안쪽"을 넘실거리는 시간과 수천 수만 년을 소요하는 진화의 시간을 대비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대 자연의 장구한 시간. 시간의 틈 사이로 정숙자가 들어간다. 전진한다. "고요에 실려 온 쪽배"를 타고 나아간다. "짧은 시도"와 "서툰 발화"에 그칠지라도 "내세의 전생"을 향해, 탐색의 여정을 시작한다. 시간 여행자 정숙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시간에게 말해야" 한다고, "고쳐 쓸 수도, 되돌려 닦아 쓸 수도 없는 시간에게/ 행복으로 사용치 못한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고. "툭툭 불거진 고통에만 열중했"던 '나'의 생을 되돌릴 수 없기에, 시간에게 다짐한다. "그 시간들에게 미안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약속한다. "말로써가 아닌 남은 인생 모두 기울여/ 온몸으로 탑 한 송이 올려야"(「영구평화로의 접근-칸트 프리즈」) 한다고. 그렇다. 시집의 3부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로 발언하는 장 場이다.
더 이상의 새로움은 '이미'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짙푸른 폭발이 있다
봉쇄된, 봉쇄된, 봉쇄된 기암-절벽을 뚫어
빈틈을 입증하는 뿌리가 있다
먼 산 이끄는 외솔이 있다
-「굿모닝 천 년」부분
시간이 압살한 '새로움'의 형해. '이미'에게 포위되어 산산히 부서진 '새로움' 앞에서 정숙자는 외친다. 부정한다. "짙푸른 폭발"을 선언한다. 아니 '짙푸르게 폭발한다'. 봉쇄를 뚫고 나간다. "기암-절벽을 뚫"는 '뿌리'가 된다. 빈틈이 생긴다. 정숙자는 할 수 있다. 시는 불가능을 모른다. 시인은 최초의 '빈틈'이다. 정숙자의 결연한 의지와 희망이 온전히 압축된 이미지 "먼 산 이끄는 외솔". 그 "짙푸른 폭발"을 바라본다. 외솔이 뿌리 내린 절벽에 균열이 시작되었다. 정숙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시가 그 뿌리가 될 수 있다고. '정숙자-외솔'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제 시간 속 정숙자의 초상과 독백을 읽고 들을 차례다.
거울이여, '현재'는
측근도 최측근도 아닌 나 자신이었군요
수많은 신체와 정신이었군요
방금 스친 현재도
끝 모를 공간으로까지 흩어지겠군요
거울이여 저의 현재는 가엾습니다
어느 때 한번 꽃을 안겨 주지 못했습니다
절뚝거리며 날아간 그들에게
이제 고맙다는 인사를 띄워야겠습니다
제가 돕지 못한 그들이 저를 위해 떠돌다니요!
-「현재의 행방」부분
4
시간의 물결 위를 흘러가는 정숙자가 새롭게 다시 맞닥뜨린 죽음. "죽음의 맛을 반추하는 건/ 히히히히힘든 일이"다. 임사 臨死를 경험한 자가 죽음을 복기하는 일. 말 더듬을 수밖에. 그 과정이 '히히히히' 삐져나오는 헛웃음 같다. 죽음이 실성失性 과 맞닿아 있다. 죽음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예예예예예고도 없이 언제든 다시/ 내 목을 끊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에 정숙자의 더듬는 말 '예예예예'가 품는 긍정.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찰학 하나를 얻는다. "나는 죽음 곁에 살고 있었네/ 나는 죽음을 방관했지만/ 죽음은 죽 나를 지켜봤던 것"(「나는 죽음을 맛보았다네」)이다. 죽음에 대한 탐문이 계속된다. 정숙자는 자신이 겪었던 죽음 체험까지 시로 표현한다. "길은 피로 이어진다/ 피로써 깊어지고 넓어지고 수려해진다"(「내 피, 맛있었니?-교통사고 트랙」)에서 쓰러져 누워 있었던 도로를 "아스팔트야~ 아스팔트야~"라고 정숙자는 호출한다. 살아서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덜 죽었던 나, 덜 살았던 나"를 명징하게 구분한다.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치여 쓰러졌던 그 순간, 죽음과 생명이 분별되지 않았던 그때를 기억에 기재하는 고통을 뚫고 건져 올린 문장 하나. "'이제부터의 당신의 삶은 덤입니다'". 죽음이 스쳐간 후 정숙자는 아스팔트에게 묻는다. "내 피, 맛있었니?". 정숙자는 "죽음의 프로"(「나는 죽음으 피로다-교통사고 트랙」)이다. 죽음을 이겨냈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다. 조금 자유로워진 것이다. 죽음과 나란히 걸어갈 수 있다는 낙관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젖은 아침 절벽에 스며드는 태양을 보라. 세포마다 빛을 머금고 피어오르는 구릉을 보라"(「젖었으므로 빛난다」)는 선언이자 명령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불가능'이 쪼개진다. '불 가능'이 된다. 나는 이것을 '가능의 불'로 번역하고 싶다. 정숙자는 불을 품은 시인이다.
바다는 잠자지 않고
더욱이 바다는 꿈꾸지 않고
다만 내디딜 뿐
살 뿐이다
더 이상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둥글어지질 수도 없지만, 그렇지만 바다는 오늘도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외로이 둥글어진다
중심을 한사코 파 내려가면
거기 아직도 바스러지는 심장이 있다
하여 파도가 곧지 않은가?
끝없는 눈물 숯 또한
무너져도 다시 타도 맑지 않은가?
-「바다는 무엇을 말하는가」부분
'눈물 숯'이 된다 해도 소신燒身하여 시의 바다에 뛰어드는 시인, 정숙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외로이 둥글어지"지고 있는 '몽돌' 같은 시인을 만난다. 시의 바다에 도달한 정숙자의 결의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침묵하는 수평선이 있다. 그 경계는 "만들어지는 거라고/ 만드는 거라고/ 만든 거라고/ 꾹 다문 한 줄/ 넓게 깊게 높이 또한 쓸쓸히/ 우그러뜨리거나 느슨하지도 않은 한 발 한 발 팽팽히 무너(「만들어진 침묵」)지겠지만, 정숙자는 시간과 죽음을 통과한 후, '우그러뜨리'는 힘을 조금 덜어놓고, 그렇다고 '느슨하지도' 않게, 시를 벼린다. "수평을 잡기 위해 바다는 몇 십억 년 흔들렸"다는 깨달음 또는 발견 앞에서 정숙자는 자신과 시의 운명을 예견한다. "혼자여서 깊고, 깊어서 넓고, 넓어서 삐걱대는 그 큰 수심"을 받아들인다. 이제 정숙자는 시의 바다에 당도했다. 시인은 그것을 "푸르른 큐브"로 명명한다.
삶-습-관
습-관-삶
관-삶-습
-「모레의 큐브」
수평으로 이동한다. 삶은 '습관'이고, 습관은 삶인데, 그것은 관에 든 삶과 다르지 않다. 수직으로 내려간다. 삶은 습관이라는 의미가 반복된다. 왼쪽 위 '삶'에서 우측 하단 '습'으로 눈을 돌린다. 대각선 가운데에 '관'이 덩그렇다. 따라 읽는다. 삶은 '관습'이다. 사람과 시라는 '습관'과 '관습'을 하나로 뭉친다. 삶과 시는 습관도 관습도 아니다.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지우는 수평선처럼, 삶과 시는 죽음으로도 갈라지지 않는다. 정숙자는 우리에게 청유한다. 같이 "일어섭시다", "일으킵시다" 외친다. 무엇이 일어서고, 무엇을 일으키는가. "풀의 엔진"을 알고 있는 나비처럼, 우리는 정숙자의 주어와 목적어를 안다. '시'이다. 시집의 마지막 문장이 "최후에 풀이 있었네"(「풀의 행성」)인 이유. 나는 '최후의 풀'을 '최후의 시'로 바꾼다. 정숙자는 최후의 시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출발한다. 주어 '나-정숙자'는 목적어 '시'를 찾아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서술어, 다음 시의 실체가 될 서술어가 「지형도」에 있다.
바람과 호수와 산맥과 어울린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 흐른다는 것. 마모되어 간다는 것 (서서히, 혹은 갑작스레)
어/울/림, 흩어 놓고 보면 참 다정하고 깊고 슬픈 단위들이다. 그렇다면 다정하고 깊고 슬픈 템포가 '어울림'일까
바다와 숲과 새들과 달과 (…) 어울리지 않고서야 어찌 푸른 태양을 빌리겠는가. 단칼에 가슴 한복판 두 동강 내는 번갯불이 없다면 진화의 톱니는 신화를 상실하리니
좀 더 완만한 기억의 탄생을 수용한다. 지상에 떨어지는 빗방울 낱낱 따뜻하고 동글고 곧고도 맑다. 어떤 대지와 어울려도 모서리 없는 구름의 실록.
'삶은 덧없지 않다. 덧이란 게 있지도 않다' 먹구름 풀어 내린 소나기 완본, 풀밭에도 사막에도 주어 술어 울창하다
-「지형도」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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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2018-여름호 <특집 제9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정숙자 시인>에서
*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나키스트』『태양의 연대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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