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한국서정시문학상_수상소감 / 수상작>
진흙에서 피어오르는 꽃
김명인
상찬(賞讚)의 목적과 대상이 어느 정도 고려되어 제정되는 것이 상(賞)이라면, 이 상의 의미는 우리 현대서정시의 근간을 세워가려는 데 뜻 둔 것이 아닐까 혼자 짐작했습니다. 그러니 저와 제 시가 상찬에 어울릴까, 잠깐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비유에 시는 '이마 위에 맺힌 이슬'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고 탄식했지요. 저는 시인의 삶이 경원(敬遠)되던 세대에 속해서, 운 좋게도 시를 생업으로까지 펼쳐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시로 살았으니, 시에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근대시의 맥락을 학문의 대상으로도 살폈는데, 특별히 1930년대의 시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제가 살핀 1930년대 우리 시사(詩史)에는 북두(北斗)처럼 빛나는 시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시를 분석하면서, 압도되었던 것은 시의 언어였습니다. 연구의 재료들은 때로 제 시의 시학으로 육화되었으니, 드문 축복이었다 할 것입니다.
시를 처음 시작할 때 제 스승님은 진흙에서 피어오르는 꽃, 곧 시는 연꽃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표에 평생을 기대면서, 저는 어떤 초월의 언저리에도 기웃거리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게걸스러운 욕망을 시의 진창에 오롯이 사무쳐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저에게 기울이느라 남의 밤도 저의 낮과 같았습니다. 어느 시대고 시의 곤고함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시업을 펼치기에 저희 세대보다 훨씬 불우한 후배들의 세상입니다. 그들에게는 등 비빌 언덕은 고사하고 더없이 가파른 시의 비탈만 아뜩하게 펼쳐진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의지로 전파해온 저 같은 사람은 할 말을 잊게 됩니다.
이 상을 제정해 우리 서정시의 진정한 뜻을 아로새기게 한 『시사사』와 백석대학교 관계자 여러분, 하잘 것 없는 저의 시집을 천거해 이 자리에 서게 하신 심사위원께, 함께 참석해 수상을 축하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수상을 계기로 주변도 자주 두리번거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10.14(금) 17:00. 백석대학교 창조관 13층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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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시낭송 : 천융희 시인>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김명인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았네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꽉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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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연보>
1946. 9. 2. (음력),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에서 출생.
1965. 고려대국문학과 입학, 조지훈 선생님을 만나 시를 습작하기 시작함.
1969. 동두천의 교사생활을 거쳐 육군에 입대함. 월남전에도 참전하였음.
1973.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로 당선.
1979. 첫 시집 『동두천』간행.
1988. 두 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 출간.
1992. 세 번째 시집 『물 건너는 사람』 간행.
1994. 네 번째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 간행.
1997. 다섯 번째 시집 『바닷가의 장례』 간행.
1999. 여섯 번째 시집 『길의 침묵』 간행.
2002. 일곱 번째 시집 『바다의 아코디언』 간행.
2005. 여덟 번째 시집 『파문』 간행.
2006. 시선집 『따뜻한 적막』 간행.
2009. 아홉 번째 시집 『꽃차례』 간행.
2010. 시선집 『아버지의 고기잡이』 간행.
2012.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정년퇴직을 함.
2013. 열 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 간행
2015. 열한 번째 시집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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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행사 현장 리플릿에서 옮김> ※ 주최『시사사』, 백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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