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시치유와 실버 예술 시대/ 권성훈

검지 정숙자 2016. 10. 29. 02:38

 

 <권두시론>

 

 

     시치유와 실버 예술시대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초빙교수)*

 

 

  인간은 놀이를 좋아한다. 놀이는 즐거움을 발생하고, 무의식에서 억압된 감정을 유희로 해소시킨다. 놀이는 도구를 이용해서 단순히 노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술, 여행, 스포츠, 오락, 게임 등으로 다양한 장르의 형식과 구조에 따라서 복잡해지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간의 많은 관심사가 여가에 집중되어 있듯이 놀이를 통해 문화가 형성되고, 문화는 하나의 산업으로서 새로운 놀이를 창출해 낸다. 그러나 예술은 개인과 공동체가 보고, 느끼고, 공감하는 등의 놀이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남기는 등의 순수 창작 행위다. 여행, 스포츠, 오락, 게임 등의 분야는 그것에의 조건 충족으로 한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창작은 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힘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예술의 영원성'이 지적되어 왔다.

  이것을 시학에서는 '포이에시스의 원리'라고 한다.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이에티케(poetlike)라는 말을 시작(詩作: 시 쓰기)이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포이에시스를 예술적 활동 전반을 이르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창조적 글쓰기로서 단순한 만들기가 아닌, 영혼의 형상화라는 의미에서 치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가지는 창조적인 포이에시스는 자신의 내적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시인의 내적 세계를 진실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세계를 독특한 시공간으로 재현하며 안전하게 형상화할 수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문학 인구의 지형도를 언급할 때 젊은층보다는 중년층과 노년층으로 확대되고, 젊은층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은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더 이상 문학이 경제적 관점에서 유용성과 실효성을 거두지 못한다고 언급한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시대적 흐름이지만 문학 전공자, 창작자, 연구자들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그동안 인문학은 다른 장르보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던 것을 볼 때 미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고, 순환되고, 재생되는 것처럼 그러한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가운데 중년층과 노년층의 관심과 지지로 시창작의 생산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창작의 경우 여타 예술보다 쉬우면서도 짧게,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간단하면서도 풍성하게 작품을 생성해 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이른바 시는 인지적 효율적, 감각적인 것들을 통합하여 예술로 승화하게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창작자의 총체적인 언어 수행으로 자아의 억압되거나, 상실된 것을 근본적인 관점에서 모색할 수 있다.

  이러한 심미적 작용을 '아이스테시스'의 원리라고 한다. 아이스테시스(aesthesis)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심미적 인지'라는 뜻이다.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덴(Baumgarten)은 '아이스테시스를 심미적 경험이 해방된다'는 뜻으로 재해석하였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아이스테시스는 전통적인 신학으로부터 아름다움이 세속적으로 해방된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아름다움을 합리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자동화된 심미적 경험이 부정됨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써 교훈적 문학이나 자연을 찬미하는 시 등에서는 아이스테시스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의 것이 부정됨으로써 생겨나는 독특한 거리감을 인식하는 데서 발생하고 직관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비투스(Habitus)로 고착된 시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시를 창작한다는 행위 자체가 '배설 원칙'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치유적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치유적인 시는 언어로서 자아 발견과 통찰의공간에 위치하며, 자아와 세계 간의 인식은 자신의 언어(기억)를 찾게 하고, 그 언어(기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몇 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한 편의 시는 문자로 구성된 이미지이므로 자아의 무의식과 의식의 기억을 탐구하게 한다. 시의 이미지는 정서와 사고에 재현된 기억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상상력을 통해 자유로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그 이미지를 통해 정서적 환기가 가능해진다. 시창작은 개인의 무의식을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로 표출함으로 억압된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시는 억압과 굴절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상실된 언어(기억)을 의식과 무의식에서 찾게 하여 감정의 변화를 수행하는 정신적 욕망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시 창작을 통한 문학치료의 기본적인 목적은 감정의 순화와 정서의 회복이며, 자아에 내재된 갈등을 해소시키는 능력과 적응기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감정의 순화와 정서의 회복은 '카타르시스의 원리'로 파악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시학』에서 논의된 후 가장 많이 심리적 기제로 쓰이고 있는 바, 시치료의 기본 원리이며 중요하게 쓰이는 진료이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의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정서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문예출판사, 2003, p.47.)는 의미로서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이들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는 정화이론과 조정이론으로 분류하는데, 정화이론은 고대의학에서 쓴 동류요법(同類療法)으로서 열병을 열기로 다스리고 한기는 한기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에 따른다.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억압된 기억을 그와 유사한 것을 통하여 이끌어내어 소산시킨다. 억압된 심리를 몰아내고 정화하기 위해서 격정을 불러일으키고 해소시킨다. 카타르시스의 정화이론에 대한 해석은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에서도 발견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카타르시스를 형태를 갖추기 못하고 무의식에 잠재되어 마음을 병들게 하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밖으로 발산시켜 치료하려는 정신요법이다.

  조정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정서가 이성 못지않게 인간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그 자체로서 해로운 것이 아니며, 다만 적절히 제어되지 못하였을 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나 감정은 적절히 통제되고 조정되어야(즉, 배설되어야)한다는 것이 조정이론이다."(변학수, 앞의 책, pp.355~356) 동류요법에 의거한 조정이론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이 이성 못지않게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그 자체로서 해로운 것은 아니며 다만 적절히 제어되지 못하였을 때 해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감정이나 격정은 적절히 통제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을 밀고 가면 곧 조정이론이 된다.(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7, pp.274~275) 조정이론의 핵심은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정서를 창조적 외면화를 통해 표출했을 때 그 정서로부터 해방되고 생리적 손상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조정이론에서 카타르시스는 부정적 정서가 범람하여 개인을 압도하는 것을 막고 이러한 정서를 적절하게 다루는 것을 배우도록 한다.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고 나면 유해한 정서는 파괴적인 힘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조정이론의 장점은 정화이론과 달리 모든 감정을 몰아내는 개념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민은 흔히 좋은 감정으로 파악되기 마련이며, 적절한 공포는 오히려 무료한 정신 건강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연민이나 공포는 제어되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지 몰아내야 한 성질의 것은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이 시창작은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억압된 정서를 표출하고 이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획득함으로써 세계간의 통합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통합이 치료사의 지시나 교육이 아닌 참여자 스스로의 자각을 돕는 형태로, 참여자의 창조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학의 고유한 기능인 '포이에시스(poiesis)', 카타르시스(catharsis)', '아이테시스(aesthesis)'의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연결되면서 글쓰기를 통한 치유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치유적 관점에서 시는 세계와 사물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현실을 바로 보게 되며 그에 근거한 사고를 수행하며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시키고 다양한 모습의 자아정체성을 통합하여 심리적 강건함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내면적 감정들을 털어 놓고 해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생각, 통찰, 정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따라서 시치료의 목적은 자유롭고, 풍성하고, 유익한 미적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연령의 인구 격차로 청소년보다 중/장년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00세 시대의 우리 문학은 학문적인 것과 창작적인 것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 학술적인 문학은 학교에서, 창작은 중/장년층과 노인층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문학 지형도 이를 중심으로 변화한다. 창작이라는 것은 경험 없이 쓰여질 수 있지만 상상만으로는 변화와 감동을 주기가 어렵다. 오래된 것에는 새 것이 흉내낼 수 없는 낡은 기록이 스며들어 있는 바, 문학은 그것의 경험으로 압축하거나, 축척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압축을 해제하거나 축척을 해체하면 지나온 '시간의 결'에 고통과 절망의 상처가 녹아 있지 않겠는가.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상처로 매듭지어진 감정을 언어에 위탁해서 풀어놓고 자신을 성찰하고 추서하며 애도하는 치유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  이 글은 저자의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시그마프레스, 2010)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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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담 』2016-가을호 <권두시론> 전문  

  * 권성훈/ 시인, 문학평론가, 2002년『문학과의식』시, 2013년『작가세계』평론 신인상 당선, 시집『유씨 목공소』외 2권,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편저『이렇게 읽었다 - 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등, 고려대 연구교수 역임, 현재 경기대 국문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