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한국 생태문학의 작은 불씨가 되어
최재천(국립생태원장)
부끄럽지만 저는 한때 문학청년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우연히 따라간 백일장에서 '낙엽'이라는 제목으로 써낸 시가 졸지에 장원으로 뽑히는 바람에 그만 어쭙잖은 꿈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심사를 맡아주셨던 장만영 시인께서 제게 특별히 과분한 찬사를 내려 주셔서 저는 제가 이 땅에 시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줄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내 찬바람만 스산히 불면 신춘문예 열병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응모조차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열병의 미열이 아직도 남아 저는 지금도 몰래 아주 가끔씩 시 몇 줄을 쓰고 삽니다. 언젠가는 수줍게 펼쳐 보일 날이 있겠지요.
2002년 한국생태학회가 세계생태학회(INTECOL)을 유치했을 때 제게 세계적인 생태학 석학들을 기조 강연자(plenary sperker)로 섭외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쟁쟁한 외국 석학들을 모셔 놓고 저는 조금은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토지』를 쓰신 박경리 선생님을 가장 중요한 기조 강연자(keynote speaker)로 모셨습니다. 제가 순차 통역을 한 선생님의 강연은 외국 학자들로부터 두 차례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많은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여류 소설가의 생태 감수성과 지혜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 감사의 뜻을 전하려 원주의 토지문학관을 찾았을 때 선생님은 제게 뜻밖의 숙제를 안겨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문학에 생태가 없다며 사재를 털어 『숨소리』라는 문예지를 만들 생각이니 『토지를 읽는다』라는 비평집을 내신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최유찬 교수님을 도와 잡지를 잘 만들어 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쉽게도 잡지는 2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지만, 저는 참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2년 동안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님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김지선, 최진아 박사, 그리고 과학철학자인 인하대 고인석 교수, 동물생태학자인 강원대 박영철 교수와 함께 동양과 서양의 생태문학 역사를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서양 문화의 이원론적 사고와 달리 동양의 고전문학은 그 뿌리부터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생태문학적인 특성을 갖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6월 24~26일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3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생태문학과 생태비평에는 아직 생태학이 없다'라는 제목의 강연까지 했습니다. 설익은 공부를 세계적인 문인들 앞에서 펼쳐 보인 부끄러움을 씻기 어렵지만, 저는 여전히 문학과 생태학의 통섭을 꿈꿉니다.
국립생태원의 초대 원장을 맡고 제가 추진한 일들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지식문화부를 만들어 출판 사업을 시작한 일입니다. 신설 기관의 출판부지만 지난 1년여 간 우리 지식문화부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첫 저작물로 좋은 출판상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생태와 다른 학문 간 통섭을 도모하기 위해 잡지 형식의 『무크 에코 플러스』를 선보입니다. 창간호 특집은 '생태+문학'입니다. 꾸며 놓고 보니 마치 새로운 문예지를 보는 듯합니다. 이 땅의 생태문학에 작은 불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립생태원이 이런 일을 하는 게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며 또 당당하게 보이도록 저희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땅에는 비록 일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뼛속 깊숙이 자연의 피가 흐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창간호에 이미 그런 기운을 후끈 느끼실 겁니다. 앞으로 많이 참여해 주시고 따뜻하게 지켜봐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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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크에코플러스+ 『MOOK eco PLUS+』vol. 01 생태+문학
* 진행|함께하는그룹파란 / 2016.11.7. <국립생태원 출판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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