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기>
『Axt』2016. 9-10./ no. 008
outro_ 문학이라는 에너지
많은 이들이 종이책은 곧 소멸될 거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를 고려하면 그런 예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꼭 종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엔 투명한 종이가 있다. 허공만큼이나 무한한 그것은 페이지가 끝나지 않는 영원한 책과 같아서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안전하다. 물에 젖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낡지도 않고 도서관처럼 공들여 관리할 필요도 없다. 전자책은 책 이상의 책이다. 단순히 책의 기능을 모사하는 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글자가 움직이고 페이지 안에 영상을 삽입할 수도 있고 음악을 흐르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종이책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최첨단 팝업북이다. 그러니까 종이책이 곧 사라진다는 건(사라져야 한다는 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충분히 설득적인 주장처럼 보인다. 종이책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이제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 그 생각을 포기한 것 같고 변화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통계적으로 볼 땐 위기인 것은 맞다. 책 판매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동네 서점이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이 항상 들리니까. 그런데 위기의 '어떤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 정말 안 좋은 분위기인 것은 분명한데 생각처럼 그렇게 나빠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뭐랄까, '요즘 어때?'라고 물어보면 '죽겠어. 힘들어'라고 습관적으로 답하는 우리네 삶처럼 그 상태는 어떤 의미로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지속되고 있다.
종이책은 곧 소멸될까? 글쎄, 내가 볼 땐 소멸로 향하는 진행은 늦춰졌거나 멈춘 것 같다. 심지어 어떨 땐 조금씩 나아지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의 우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영역에서 전자책은 엄청난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생각처럼 종이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들은 자신은 전자텍스트로 자동적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건 오산이었다. 그들은 이 두 형태의 글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글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내기는 힘들다. 그럴수록 책은 더욱 그것의 존엄성과 권위를 되찾게 될 것이다. 불행에 처한 우리를 받아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펼치면, 책은 우리에 대해서 받아준다. 페이지마다 느껴지는 어떤 불끈불끈한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책의 권위요, 친근함이요, 시사성인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내가 너무 순진하거나 통계니 추세니 이런 걸 정확히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괜찮은 것 같다. 아니,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도 든다. 책이라는 오브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아직도 책장에 책이 한두 권 늘어가는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는 한 종이책의 소멸은 아직이다.
'종이책'의 자리에 '문학'을 놓아보자. 비슷하겠지? 그러면서도 잡지를 만드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잡지라니. 세상에, 잡지라니.' 종이책들이 사라진다고 가정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잡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잡지를, 그것도 문학잡지를 만드는 건 솔직히 이상하다. 질 걸 알면서 덤비거나 떨어질 시험에 응시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생각한다. '이런 어리석은 노력은 의미가 있다.' 소멸되는 그 순간까지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쨌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이란 것도 그렇지 않은가. 다시 배고플 걸 알면서도 먹고, 언젠가 죽겠지만 오늘은 열심히 운동을 하며 사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어떤 행위를 반복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힘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Axt』는 계속 나올 것이다. 바라기는 이런 노력과 애씀으로 종이책과 나아가 문학의 소멸까지 막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면 참 좋겠다.
더불어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롭게 선보인 『Littor』를 언급하고 싶다. 읽고 쓰는 '릿한' 사람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겠다는 멋진 포부를 품고 감각적인 제목으로 나왔다. 언론이나 독자들은 심심찮게 『Axt』와 비교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동료가 하나 늘어난 것 같다. 『Littor』의 편집자는 이런 농담을 했다. '『Axt』는 홀수에 나오고 『Littor』는 짝수 달에 나온다. 달마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읽어줬으면 한다.' 나 역시 독자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잡지를 다양하게 읽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유행이 생기길 원한다. 들리는 소문이 맞다면 앞으로 새로운 문학잡지가 더 생길 것이다. 멋진 일이다. 월간지도 읽고 격월간지도 읽고 계간지도 읽고 반연간지도 열심히 읽자. 다양하게 읽고 즐기는 문학적인 어떤 유행과 흐름이 독자들 사이에서 생기면 참 멋지겠다.
지난 호부터 『Axt』는 리뉴얼을 했다. 저명한 필자들의 산문들과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소설과 리뷰까지. 부디 일독을 권한다. 이번 호의 커버는 김연수 소설가다. 인터뷰는 번역가 노승영 선생이 맡아주셨다. 번역가의 눈과 시각으로 접근할 때 김연수는 어떤 소설가일까. 흥미로운 질문이 흥미로운 답변을 이끌어냈다.
김연수 소설가가 했던 말 중에 인상에 남은 말이 있다.
"그 시절 나는 쓰고 싶어 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었다. 쓰고 싶은 내용이나 이야기가 있던 것이 아니라 '쓰고 싶다'는 에너지 그 자체가 있었다. 그 에너지가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내용과 이야기가 아니라 쓰고 싶어 하는 에너지가 작가를 만들었다는 것. 혁신적인 기획과 대단한 내용물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그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라도 문학적인 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문학의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문학적인 행위는 크게 볼 때 두 가지밖에 없다. 쓰기와 읽기. 그러니까 쓰고 싶은 에너지와 읽고 싶은 에너지 그 욕망이 있다면 책도 문학도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Axt』는 쓰고 싶은 작가의 에너지와 읽고 싶은 독자의 에너지를 온전히 담아내는 잡지가 되도록 계속 애쓸 것이다. ▩ (※ Art & Text = A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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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배수아 백가흠 정용준 노승영
* 대표집필 정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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