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詩론>
난해성? 시적 진화의 결과
박현수(시인, 문학평론가)
많은 이들이 요즘 시가 어렵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시론에 등장한 것은 아마도 100년도 지난 것 같다. 현대시가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목소리를 매체로 하던 시대에서 활자를 매체로 하는 시대로 변화하면서 생긴 진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매체의 변화에 따른 이런 시적 본질의 변화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자는 모더니스트 이상이었다.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아니한 글자가 그 자리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니 무슨 암시이냐 무슨 까닭에 한번 읽어 지나가면 도무소용인 글자의 고정된 기술 방법을 채용하는 흡족치 않은 버릇을 쓰기를 버리지 않을까를 그는 생각한다./ - 이상,「지도의 암실」에서
이상이 문제 삼고 있는 '글자의 고정된 기술방법'은 '한 번 읽어 지나가면 도무소용'이 되는 방식이다. 그는 한 번 읽고 지나가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과거의 글쓰기 방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방식은 근대 이전의 민요나 시조처럼 화자가 낭독을 하면 청자가 바로 알아차리는 글쓰기 방식을 가리킨다. 목소리를 매체로 하여 낭독이나 낭송을 하는 과거의 시는 목소리의 휘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리듬감을 풍부하게 느끼고, 한 번 들으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한 번 듣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다면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다음 구절을 놓칠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시 쓰기 방식은 한 번 읽고도 그 의미가 바로 파악되지 않는 것을 장점으로 삼는다. 시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활자 매체의 시대에, 우리가 읽는 시가 너무나 단순하여 한 번 읽자마자 모든 의미가 파악되어 버리면 독서의 과정이 너무나 단순하게 되어 독자는 금방 식상해 할 것이다. 낭독에 비하여 묵독, 즉 눈으로 읽는 방식의 속도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묵독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에 시 한 편을 읽는 데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만일 과거의 시조나 민요를 활자로 옮겨놓으면 100편을 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눈으로 읽어서 그 시적 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시론 수업시간에 시로 만들어진 낯선 노래를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노래를 듣게 하면 학생들이 매우 지겨워하는 것도 이런 매체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은 이 짧고 단순한 가사를 왜 이렇게 오래 들어야 하는가 하는 데에 불만을 나타낸다,
묵독으로 소통하는 근대의 시는 텍스트를 두고두고 음미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즉 '한 번 읽고 지나가도 그 의미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그런 글쓰기 방식을 지향한다. 지각과 동시에 이해가 이루어지는 이전의 방식이 아니라, 지각의 과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이것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하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며, 지각을 힘들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하는 데 시의 목적이 있다고 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어느 대상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한 방법이기에 지각의 과정은 그 자체가 미학적 목적이고 따라서 되도록 연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어느 모더니즘 이론가는 '고의적으로 방해받는 형식(deliberately impeded form)'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해 자체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고의적으로 방해를 하는 형식이 근대문학(특히 모더니즘 시)의 특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에 시가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는 현상을 반성하며 여러 가지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그 대안 중에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드는 것이 'SNS시'나 '디카시' 같은 것이다. 먼저 하상욱의 SNS시를 보자.
착하게 살았는데,
우리가 왜 이곳에
- 하상욱,「지옥철」전문
위에서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참고 살기에는
- 하상욱,「층간소음」전문
재치가 빛나는 작품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를 풀 듯 읽고 한바탕 웃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한 번 푼 수수께끼를 다시 거들떠보지 않듯 이런 작품도 아직 읽지 않는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억할 뿐 그 이후에는 도무소용이다. 디카시는 시인이 난해성을 해소하기 위해 시에 디지털 사진을 도입하는 시 쓰기 방식이다.
이제는 낡은 고물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온
저 잠수함을 보라
그 구부정한 잠망경으로 얼마나 세상이 보일까
하릴없이 눈 비 맞으며 녹슬어가는 고추건조기
-송찬호,「건조기」전문
이 시는 이 자체로만 보면 시골 경험이 부족한 독자에게 다소 난해한 인상을 준다. 제목이 '건조기'라는 점을 볼 때 이 시는 건조기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건조기가 무엇인지 모르면 이 작품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건조기는 시골에서 고추를 인공적으로 마르게 하는 데 사용하는 농기계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의 형태도 다양하기에 어떤 건조기냐에 따라 잠수함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이 실린 다음과 같은 사진을 보면 지금까지의 설명이 불필요해진다.
이 사진 (『시산맥』2016_가을호 14쪽 참조) 을 보면 이 시는 건조기를 처음 보는 독자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은 시가 된다. 지금까지의 설명 없이도 이 시는 완전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난해성 해결과 동시에 시의 중요한 생명이 사라지는 느낌도 떨칠 수 없다. 언어를 통한 상상이 가져올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고추건조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종류의 다양성 때문에 이 시를 읽고 자신의 머릿속에 그릴 이미지는 확정적이지 않다. 그 빈틈은 상상력이 메워주고 그것이 시를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사진 제시는 너무나 명확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제시해줌으로써 시적 상상력의 개입을 방해해버린다. 그래서 시는 한 편의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사진 설명으로 추락해버린다. 난해성의 해결이 시를 추방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SNS'나 '디카시'나 '디카시' 같은 방식은 시의 난해성을 해결하는 올바른 진화 방식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의 난해성을 껴안는 진화가 아니면 진정한 진화라 하기 어렵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다루기 어려운 게임이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것이 쉽기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선택과 설정 과정은 상당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다만 이를 통해 시의 난해성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즉 시의 문제에 있어서 독자들이 난해함을 싫어한다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선입견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난해함을 껴안은 시의 진화는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을 찾아가는 시인이 미래의 시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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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2016-가을호 <권두詩론/ 난해성? 시적 진화의 결과> 전문
* 박현수/ 시인. 문학평론가,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위험한 독서』, 평론집 『황금책갈피』등.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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