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내일을 여는 시인들의 지혜/ 송기한

검지 정숙자 2016. 6. 26. 16:00

 

2016년 시와정신 여름호를 펴내면서

 

 

     내일을 여는

                            

        시인들의 지혜

 

 

    송기한/ 문학평론가

 

 

  서정시의 요체는 자아와 세계의 부조화와 갈등에 근거한다. 이른바 서정적 동일성에의 욕구가 서정시를 만들어내는 근본 동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들치고 자아 내부의, 혹은 세계와의 균열을 감각하지 못하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시인들이 있다면, 그는 사회적 전일성이 확보된, 이상화된 사회의 구성원이거나 절대 신의 위치에 올라선 존재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영원한 합일이라는, 이 가없는 도정을 위해 시인들은 고투하고 서정적 힘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이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내적 충동에 의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외적 현실과의 타협이나 초월을 통해서 이 거대한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그것이 항상적이고 간단없는 일임은 서정시의 오랜 역사가 증거해준다. 만약 그러한 합일의 길들이 쉽고 간단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서정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상고시대에도 시는 쓰여졌고, 지금 여기에서도 시는 계속 쓰여지고 있다. 이런 심연의 역사는 그러한 동정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고, 용이하게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정시의 그러한 역사를 통찰할 경우, 실상 종교나 심리학,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접점으로 모아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인간사의 3대 서사구조는 유토피아→추방과 타락→회복운동이라는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공간, 어머니와 자식의 이자적 관계, 그리이스의 민주정 사회가 유토피아의 공간이라면,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아버지라는 존재의 등장, 중세의 암흑사회와 자본주의는 추방과 타락의 공간이 된다. 이런 논법에 의하면 지금 여기의 현실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른바 회복의 시간에 해당된다. 그러한 도정이 종교와 심리학, 사회학의 기본 구도이기에 서정시가 만들어지는 생산적인 힘들도 회복운동이라는, 3대 서사구조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는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과 회복운동이라는 인류적 서사양식에 동의한다면, 이 땅에서 운위되는 서정시의 지향점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금방 짐작하게 된다. 바로 유토피아 공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서정시의 기본 주제가 되는 것이다. 몰론 이 정점에 이르는 길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수많은 통로들이 놓여져 있고, 화해의 방식이나 그 초월의 방식도 다대하게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여 자기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시인의 세계관과 방법적 선택에 달린 것이지 획일화된 노선이나 강요된 힘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시단에는 하루나 한 달 혹은 일 년 사이에 수많은 시인들이 나름대로 자랑스런 포부와 의욕을 갖고 새출발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시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 문단을 풍성하게 하고 시단을 두텁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에 이르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을 개발하지 않고 시류나 고전적인 방식, 혹은 관습화된 방식을 여과없이 수용한다면, 시인으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참신하고 질 좋은 서정시는 기왕의 내용과 방법을 초월한 데서 탄생한다. 자아와 세계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달리는 평행선처럼 좁혀지지 않는 난수표와 같은 것이다. 이를 풀어헤쳐나가는 도정은 결코 쉽게 달성되지 않는다. 기성의 시인들 뿐만 아니라 신인들의 경우도 서정시의 그러한 과제가 매우 난망한 일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초월의 방식을 개발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이 시대 시인의 의무일 것이다.

  (계간지 시와정신』/ 주간 직대 송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