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책
정숙자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갈피마다 바람 불고 여백에서 풀이 자란다
행간을 타고 세월이 흘러든다
오후 네 시/금요일/시월쯤으로 해 두자
이 모두가 쉰셋의 각도로 기울어진 나의 오늘이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만 인간이다
․열심히 기는 것이 나는 것이다
․죽었다는 소식은 죽어간다는 안부보다 따뜻하다
시시각각 문장이 지나간다
누가 누구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은 자신을 읽는 것이다
자신에게 밑금 치고 자신을 외운다
자신과 먼 것은 기억이 묽다
내가 쓴 몇 조각 글도 내가 읽은 나 자신에 불과하다
동서고금 양서들 또한 자신을 탐독한 이들이 생애를 걸
고 찾아낸 자신이었음을
‘를’이 ‘을’을 밀어내고 ‘는’이 ‘가’를 갈아치우는 현
장, ―표지만이 화려하다
심장으로 머리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사람/지구/우주는 엮지 않아도 이미 책이다
많은 책들이 자전하며 공전한다
어린 시절의 전개가 미래를 완료한다
대단원에 가까울수록 피와 뼈와 모서리가 닳아진다
맑고 푸른 수상록 ․ 동화집을 떠나 왜 이런 장르에 들어
왔을까
-『애지』200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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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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