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여행권
정숙자
우리 집 살림살이 여행보다 책이 알맞다
초원이나 내뻗은 강 눈앞에 없을지라도 책 속에는 한 그
루 보리수가 자란다
가지를 따라 하늘이 넓어지고 새들이 날고 잎새들 달랑
달랑 바람을 닦는다
오래된 책들은 어느 갈피에서도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귀 시린 누옥에 군불 지필 몇 마디 말씀 잊지 않는다
세월 거느린 보리수는 어떤 고비에서든 상큼상큼 아침을
연다
총총히 매어 단 이슬방울들 산이나 바다보다도 맑고 따뜻
하고 또 의젓하다
마음 둘러보는 여행 말고는 한눈팔 수 없는 우리 집 살림
바깥이야 봄 햇살 난난난 분분분인데 나는 맨발인 채로
추녀 밑 그늘을 산다
날개가 한쪽뿐인 낮달과 보리수와 대작(對酌)을 한다
-『애지』200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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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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