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평론/ 물별, 정숙자 - 반경환

검지 정숙자 2010. 11. 29. 00:36

 

 

    물별-정숙자

                                  

    반경환(문학평론가)

                                 

 

  1

 태양은 오늘도 산란기다

 강물 가득 흔들리는 물별을 봐라

 붕어로 송사리로 쏘가리로… 맑고 따뜻한 지느러미로… 바람으로 몸이 풀린다

                   

   2

 한가람 은물결 위에 멍석 한 닢 떠내려가네

 올록볼록 선친 기침소리 떠내려가네

 은하계 엎질러져 떠내려가네

 우리 어머니 밭 매고 돌아오실 때

 얼굴에 흐르던 땀방울들도 저기 돌아와 반짝거리네


   3

 예술을 동경한 몇몇 물별은 여인에게 스며 태아로 크고 나비를 사랑한 몇몇 물별은 대지에 들어가 꽃을 꺼내고 새소리 그리운 몇몇 물별은 품 넓은 나뭇가지와 잎새들을 뿜어 올리고


   4                      

 나도 한 알 물별일 게다

 어머니가 우물물 길어 마실 때 따라 들어간 빛살일 게다

 절망에 먹히는 삶일지라도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                 

 뒤져라, 뒤져라, 뒤져라…

 DNA가 태양이란다    

 네 몸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굴절을 모르는 광선이란다


   5

 강물 바라볼 때 아늑했음도

 건네받은 물 한 그릇 두고두고 고마웠음도

 <물별> 그 이름이 그토록이나 간절했음도                  

 해돋이엔 저절로 눈이 뜨이고 이슬 내린 풀언덕 정다웠음도       

 물로써 마지막 발을 헹구고… 하늘로 햇살로… 다시 물방울로 되돌아감도

                     

   6

 흘러야 물이다 떠내려가네                    

 구름 걸린 산봉우리 떠내려가네                    

 지구를 감은 많은 길들도 발자국 빛내며 떠내려가네

 우리 모두는 태양이란다

 태양이 낳은 태양을 닮은 태양의 물별이란다 


 -『밝은음자리표』, 종려나무, 2008년

 

 


  정숙자 시인은 195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고,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등의 시집을 출간했고,        김수영 이후, 가장 뛰어난 산문집인 『밝은음자리표』를 출간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정숙자 시인의 삶의 이력과 그 경력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한미해서 그것이 곧바로 ‘천재의 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 나일강가에 버려졌던 모세, 코르시카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던 나폴레옹,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아버지에 의해서 외디프스 등이 바로 그러한 사실들을 증명해준다. 정숙자 시인이 예수와 모세와 나폴레옹과 외디프스보다도 더 불행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리여자중학교’ 졸업이라는 최종학력이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정숙자 시인은 나이 40을 넘긴 후에야 동국대하교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나왔다고 한다.) 문화선진국이든, 문화후진국이든 간에,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전혀 학력이 없다는 것은, 다만, 망망대해 속의 로빈슨 크루소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모형제도 없고, 스승도 없고, 그 어떠한 선, 후배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사나운 비바람과 거친 파도와 함께, 그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다 해결해야만 한는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일찍이 정숙자 시인이 제일급의 시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그처럼 오랫동안 무명 시인의 길을 걸어왔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천재의 고독에는 피가 묻는다(「시와 천재」, 『밝은음자리표』, 종려나무, 2008년).” 피가 묻은 고독은 고통이 되고, 그 고통은 제일급의 시를 낳는 생산적인 고통이 된다.

  맹자는 “천하의 광거(廣居)에 살고, 천하의 정위(正位)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한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그것을 실천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나 홀로 그것을 실천하다. 부귀도 음란하게 할 수가 없고, 가난도 뜻을 전향하게 할 수가 없고, 어떠한 권력도 굴(屈)케 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진정한 천재(현자)는 인류를 구원했던 문화적 영웅들처럼 자기 자신의 분명한 꿈(목표)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분명한 목표를 위해서 그 어떠한 장애물마저도 다 극복해낼 수가 있는 삶의 의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꿈(목표)은 만인들이 다 함께 살 수 있는 넓은 땅이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만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도(大道)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만인들이 그의 꿈을 성원해주면 그들과 더불어 그 꿈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가 못하다면, 자기 혼자서 그것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부유해도 음란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가난해도 뜻을 전향할 수가 없는 사람이며, 또, 그리고,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이다. 정숙자 시인은 그의 「시와 생명」에서 은둔자(隱遁者)의 삶을 살아갔던 한산(寒山)의 시를 분석하면서, “시는 돈이 되지 않아 속되지 않고, 권력이 되지 않아 욕되지 않고, 명예가 되지 않아 죄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가 있고, 또한, 그의 「시와 철학」에서 “영웅은 그 출생이 비천하고, 생애가 비참하고, 죽음이 참담해야 된다”고 역설한 바가 있다(이상, 『밝은음자리표』). 시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언어예술이며, 자기 자신의 행복과 모든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언어예술이다. 명예와 명성은 어떠한 비굴한 굴종도 불허하지만, 오직,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비굴한 굴종과 개 같은 학대마저도 감내하게 된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과 자기 자신의 행복과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진정으로 명예와 명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10년, 20년의 무명이 어떠한 문제가 될 수가 있겠는가? 타인의 강요와 어떠한 권력의 강요가 아닌 이상, 오직, 자기 자신의 꿈을 위해서 시를 쓰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의 다른 기쁨, 다른 행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숙자 시인은 돈을 바라고 시를 쓰지도 않았고, 어떠한 권력을 위해서 시를 쓰지도 않았다. 또, 그리고 어떠한 명예와 명성을 바라고 시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김제평야의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입신출세할 수 있었던 의사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오직, 시와 문학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정상적인 학교수업의 길을 마다하고, 그토록 어렵고 힘든 무명 시인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무명은 천지창조 이전의 암흑 속의 길이며, 오직, 생살을 후벼 파는 듯한 형극의 가시밭길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무명의 길은 그 출생이 비천하고 생애가 비참했던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명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멀어진 길이며, 그러나 그 무명만큼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은 더없이 아름답고 깨끗한 이름이며, 그 이름 속의 주인공들은 프리드리히 니체처럼, 아니, 김수영 시인처럼, 그 도덕적 선의 고지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필연적으로 내일의 인간,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가 항시 스스로를 오늘과 상반되는 존재로 생각해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기분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의 적은 오늘의 이상이었다. 철학자라는 이름의 인간의 육성자, 이 비범한 존재들은 이제까지 스스로를 지혜의 친구라기보다는 위험스러운 물음표, 불쾌한 바보라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의 불쾌한 양심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자각해왔다. 그러한 사면은 수행하기도 어렵고 달갑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미덕의 심장에다 메스를 댐으로써 그들의 비밀한 과업이 무엇인가를 드러냈다. 즉,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을 인식하고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인적미답의 새 길을 탐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당대의 가장 찬양받는 도덕들 속에 얼마나 많은 위선과 안일, 나태, 타락, 허위 등이 숨겨져 있는가를, 그리고 당대의 미덕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를 폭로해왔다. 그들은 항시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우리들은 오늘날 그대들이 가장 불편스러워하는 곳으로, 그러한 길로 가야만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자아 보아라, 당신ㄷ,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일까? 탈레스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을 ‘물’이라고 보았고, 아낙시메네스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을 ‘공기’라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을 ‘불’이라고 보았고,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이라고 보았다. 물은 고체와 액체와 기체로 변하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물에 의해서 탄생하고 물에 의해서 죽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수성론자’로서 탈레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엷어지면 불이 되고, 공기가 짙어지면 물이 되고, 그리고 공기가 더 짙어지면 흙이 된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들은 공기에 의해서 탄생하고 소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기는 모든 생명체들의 입김이며, 영혼이다. 불이 변하면 물이 되고, 물이 변하면 흙이 된다. 이 흙이 변하면 물이 되고, 이 물이 변하면 불이 된다. 이것이 ‘화성론자’로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라면,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의 상호 분리와 그 결합 속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된다고 보았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원자라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원자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이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가 명명한 이 원자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가 없다는 점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그 원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된다는 점에서, 모든 변화의 근본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변화와 운동의 논리적 가능성까지도 부인했던 만물의 불면법칙을 주장했던 철학자이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유전법칙을 주장했던 철학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이 만물의 불변법칙과 유전법칙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했던 가장 탁월한 이론이었던 것이며, 오늘날은 영원한 불변의 진리로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정숙자 시인의 「물별」을 읽으면서 어느덧 수성론자가 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물에 의해서 태어나고, 그 물을 마시면서 그 물에 의해서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고 물이고, 어머니도 물이다. 아버지가 지닌 정자도 물이고, 어머니가 지닌 정자도 물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 같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성된 생명체들이며,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며 태어난 생명체들이다. 어머니의 젖도 물이고,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도 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이 없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도 없고, 물이 없으면 때 묻은 얼굴을 씻을 수도 없다. 물은 만물의 생명수이며, 이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근본물질이다. 정숙자 시인은 “태양은 오늘도 산란기다/ 강물 가득 흔들리는 물별을 봐라”라고 노래하고, 또한, 그 태양은 “붕어로 송사리로 쏘가리로… 맑고 따뜻한 지느러미로… 바람으로 몸이 풀린다”라고 노래한다. 태양이 물별을 낳고, 물별은 “붕어로 송사리로 쏘가리로… 맑고 따뜻한 지느러미로… 바람으로” 그 몸이 풀리게 된다. 물별의 아버지인 태양, 그러나 그 태양은 물별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물별은 정숙자 시인이 1988년에 명명한 조어(造語)이고, 그 물별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의 현상을 지시하게 된다.   

  물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물은 또한 끊임없이 흐른다. 물별들도 끊임없이 생성되고, 그 물의 흐름에 따라서 끊임없이 떠내려가게 된다. 시인은 한강-한가람은 한강을 뜻한다-을 바라보면서, 그의 고향인 김제벌을 떠올려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가람 은물결 위에 멍석 한 닢 떠내려가네/ 올록볼록 선친 기침소리 떠내려가네”는 멍석 한 닢 위에 누워서 해소와 천식 때문(?)에 기침을 하시던 아버지를 떠올려보는 시구에 지나지 않으며, “은하계 엎질러져 떠내려가네/ 우리 어머니 밭 매고 돌아오실 때/ 얼굴에 흐르던 땀방울들도 저기 돌아와 반짝거리네”는 밤하늘의 은하수가 다 쏟아져 내린 듯한 물별들을 바라보면서, 밭 매고 돌아오신 어머니의 땀방울을 떠올려보는 시구에 지나지 않는다. 물별들은 멍석 한 닢 위에 누워 있던 아버지도 되고, 또한 물별들은 땀방울 송글송글 맺혀 있던 어머니도 된다. 그 물별들은 밤하늘의 은하수도 되고, 또한, 그 물별들은 아버지의 기침소리도 된다. “예술을 동경한 몇몇 물별은 여인에게 스며 태아로 크고 나비를 사랑한 몇몇 물별은 대지에 들어가 꽃을 꺼내고 새소리 그리운 몇몇 물별은 품 넓은 나뭇가지와 잎새들을 뿜어” 올린다.

  너도 물별이고, 나도 물별이다. 이 세상에는 물별이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도 한 알 물별일 게다”라는 시구는 가정어법이 아닌. 자기 확신의 단정어법에 지나지 않지만, 그 단정어법을 하나의 시적 장치로써 가정어법으로 변용시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우물물 길어 마실 때 따라 들어간 빛살일 게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절망에 먹히는 삶일지라도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시구는 모든 생명체는 물별이라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뒤져라, 뒤져라, 뒤져라…/ DNA가 태양이란다/ 네 몸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굴절을 모르는 광선이란다”라는 시구가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DNA, 즉, 유전인자는 그 생명체의 정보를 뜻하고, 그 정보의 염색체의 단백질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태양의 유전인자, 즉, 굴절을 모르는 광선이라는 것이다. 물은 불(태양)이고, 불(태양)은 물이다. 따라서 내 몸의 유전인자가 물(불)이었기 때문에, 강을 바라볼 때마다 아늑하게 되고, 건네받은 물 한 그릇도 더없이 소중하고 고맙게 된다. 정숙자 시인은 1988년 ‘무별’이라는 새로운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첫 시집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 두 번째 시집 『그리워서』, 세 번째 시집 『이 화려한 침묵』에서 그 물별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러나 그 물별이라는 이름은 아직까지도 보편적으로 폭넓게 사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정숙자 시인이 그 아름답고 새로운 말을 국어사전에 올리기 위하여 ‘국립국어원’으로 문의한 결과, ‘노견’을 ‘갓길’로 정정한 것처럼, 그 언어의 “타당성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담당자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무명의 언어는 고독 속의 언어이고, 무명의 언어는 고통 속의 언어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무명의 언어가 그 무명의 껍질을 뚫고 새로운 세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그 언어는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언어가 된다. 그렇다. 이 물별의 이름은 거룩하고 순결한 언어이며,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언어이다. 왜냐하면 해돋이에도 물별이 떠있고, 이슬 내린 풀언덕에도 물별이 맺혀 있기 때문이다. 물로써 마지막 발을 헹굴 때에도 물별은 떠있고, 그 물별들은 “하늘로 햇살로… 다시 물방울로” 그 생명력을 결코 잃는 법이 없다. 나는 이 불별의 이름이 정숙자 시인의 ‘간절했음’ 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의 생식선을 자극시키고, ‘물, 불, 공기, 흙, 물별’ 등으로 사용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물은 흘러야 물이다. 이 물의 흐름 속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간다. 너도 떠내려가고, 나도 떠내려간다. 그대도 떠내려가고, 그대의 애인도 떠내려간다. 꽃도 떠내려가고, 새도 떠내려간다. 태양도 떠내려가고, 태양을 닮은 물별도 떠내려간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만물은 유전하고, 그 변화와 운동 속에서 모든 새로운 생명과 모든 새로운 언어들이 새롭게 태어난다. 어느 인간과 어느 물별이라는 특정한 개체는 소멸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과 물별이라는 종은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간다. 옛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탄생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난다. 어머니도 물별이고, 아버지도 물별이다. 강도 물별이고, 붕어도 물별이다. 송사리도 물별이고, 쏘가리도 물별이다. 나비도 물별이고, 새도 물별이다. 이슬도 물별이고, 땀방울도 물별이다. 너도 물별이고, 나도 물별이다. 이 세상에 물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의 사유가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 언어가 없으면 어떠한 사유의 진전도 가능하지가 않고, 우리 인간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가능하지가 않다. 우리 인간들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모든 것을 언어(문자)로 기록할 수 있었던 그 능력 때문이었던 것이며, 이 언어(문자)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고,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고 미래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언어의 기능은 사물의 인식 기능과 의사소통의 기능 등으로 설명할 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물의 인식 기능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알 수 없는 것, 낯선 것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고, 이미 알고 있는 것, 낯익은 것은 편안함과 안락함의 대상이다. 알 수 없는 것, 낯선 것은 따라서, 하루바삐 그 정체를 드러내고, 우리 인간들의 앎의 체계 속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천둥과 번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피뢰침을 만들었고, 모든 동식물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하여 유전자공학을 정립했다. 인간의 심리구조를 밝혀내기 위하여 정신분석학을 정립했고, 우주의 근본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물리학을 정립했다. 이 알 수 없는 것, 낯선 것은 기존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새로운 언어는 그 명명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독창적인 명명자는 언어의 기원을 소유한 전제군주와도 같으며, 우리 인간들은 그 명명자의 은총에 의해서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과 우리 인간들의 질병마저도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독창적인 명명의 힘을 가진 자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며, 으뜸가는 문화의 육성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육성자들의 피눈물 나는 학문연구와 그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의 재앙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뭇짐승들과도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숙자 시인의 『밝은음자리표』는 김수영 이후,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산문집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니체는 ‘위험스러운 물음표와 불쾌한 바보, 그리고 동시대의 미덕에다가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던 파렴치한의 삶을 살다가 갔고, 김수영은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도, 그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게 공헌하기 위해,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삿대질에서처럼, 그 불한당의 삶을 살다가 갔다. 성자와 신성모독자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시인과 파렴치한(불한당)도 둘이 아닌 하나이다. 무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신성모독자이고, 유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성자이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유명의 인사는 어제의 무명의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고, 그 무명의 인사는 그 무명의 거룩하고 순결한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그토록 더럽고, 추하고, 잔인한 무명의 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불순한 것이고, 그것은 기존의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하게 된다. 예수와 부처가 노예의 도덕으로 주인의 도덕을 모조리 전복시켜버린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만일, 니체와 김수영이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장인정신으로 그 파격적인 삶을 살다가 갔다면, 정숙자 시인은 여성적인 섬세함과 그 지적인 감수성으로 가장 고귀하고 우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와 김수영이 장중하고 울림이 큰 남성의 형식이라면, 정숙자 시인은 고귀하고 우아한 여성의 형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 남성의 형식과 여성의 형식에 다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언제, 어느 때나 대쪽 같은 장인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오직, 온몸으로, 온몸으로 시(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남성의 세계는 대립과 갈등의 세계이며, 여성의 세계는 포용과 화해의 세계이다. 정숙자 시인의 여성의 형식 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장중하고 울림이 큰 영웅주의의 새싹이 언제, 어느 때나 자라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숙자 시인은 대한민국의 역사상, 보기 드물게 역사 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을 한 시인이며, 따라서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별’은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이고, 「물별」은 가장 아름다운 이 땅의 서정시이다. 이 ‘물별’의 명명자는 정숙자 시인이고, 이 ‘물별’과 함께, 정숙자 시인의 영광과 우리 한국어의 영광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물별, 물별, 물별!

  이 물별이라는 이름은 내가 우리 한국어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게 받아들인 말이다. 이 물별이라는 언어의 기원에는 ‘정숙자’라는 이름이 각인되어 있고, 우리 한국인들은 이 물별이라는 이름을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별, 물별, 물별!

  아아, 영원한 우리 한국인들의 언어의 사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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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경환의 명시 감상 3』에서/ 2009.10.5 종려나무 펴냄    

 * 반경환/ 충북 청주 출생. 1988년《한국문학》신인상, 1989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