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시와 생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0. 11. 24. 02:20

 

   

          시와 생활

 

           정숙자

                                                          


   나에게는 삼십 년 넘어 위안을 주는 공책이 한 권 있다. 열서너 살 때부터 여기저기서 읽고 베낀 시들로 채워진 보고다. 거기 적힌 어느 시 한 편인들 나에게 꿈과 빛이 아니었으리요, 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내 삶이 고단할 때마다 펴보았던 시 한 편을 여기 옮길까 한다.


   나는 바다로 가야지, 쓸쓸한

   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내 오직 원하는 것, 돛대 높직한

   배 한 척과 방향을 가려줄 별 하나,

   타륜의 돌아가는 충격,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흰 돛폭,

   해면을 뒤덮는 잿빛 안개, 훤히 트여

   오는 새벽하늘만 있으면 그만이어라.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지, 흐르는

   조수가 부르는 소리;

   거역치 못할 난폭한 소리, 분명히

   날 부르는 소리를 따라,

   내 오직 원하는 것, 흰 구름 날리는

   바람 부는 날씨와 튕기는 물보라,

   날리는 물거품, 울부짖는 갈매기만

   있으면 그만이어라.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지,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의 생활을 찾아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 바다,

   갈매기와 고래의 길을 찾아가야지;

   내 오직 원하는 것, 껄껄거리는 친구

   녀석의 신나는 이야기와

   오랜 노동 끝난 뒤의 고요한 수면과

   달콤한 꿈만 있으면 그만이어라.

                                          -바다가 그리워-

                               

   이 시는 널리 알려진 존 메이스필드(영국, John Masefield 1878~1967)의 많은 해양시 중 하나다. 그는 열세 살 무렵부터 해양 생활을 시작하여 각지를 편력했다고 한다. 이 시는 생활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됨직하다. 시와 생활과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보고 들어온 모든 환경은 생각을 이끄는 배경이며, 그 생각의 표현에 있어서 매개의 역할을 한다. 존 메이스필드도 오랜 해양 생활이 없었다면 이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환경은 모든 이에게 체험의 문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체험은 생활에서 얻어지는 사유의 골격이며, 그 사유에서 빚어진 언어야말로 한 순간에 지어서 쓸 수 없는 내면의 육화다.


   “시는 곧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뷔퐁이었던가. 나는 자신에게 다가서서 시가 삶이 되는 게 아니라 삶이 시가 된다는 점을 인식시키고자 한다. 또한 쟝 꼭토의 “시는 정확하기가 마치 수학과 같다. 시인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라는 말도 염두에 둔다. 그리고 이 말을 시뿐만이 아닌 삶이라는 각도에서도 비추어 보고자 한다. “삶은 정확하기가 마치 수학과 같다. 인간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라고! 탱자나무에서 모란이 필 수 없고, 고욤이 수밀도가 될 수 없듯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얻으려면 우선 삶을 다듬어야 하고, 삶을 다듬으려면 일상을 고삐 매어야 할 것이다. 옛날 선비의 걸음걸이가 느렸던 것은 발을 떼어놓기보다 마음으로 길을 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일지라도 헛디딤이 있을 테지만 곧 실족임을 깨닫고 다시 나아가려는 의지를 길라잡이 삼아야 되지 않을까.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를 수 있으되 세 번 발 씻어야 하지 않을까.

   시는 사람보다 나중의 일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을 보더라도 시 쓰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의 파종이다. 시와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언뜻 보기에 좋은 시 한 편은 어휘의 절묘한 조합인 것 같지만, 실은 희로애락이 잘 승화된 언어의 풍경이다. 삐뚤빼뚤 백 리를 달리느니보다 느리지만 합당한 한 걸음이 시에 값할 것이다. 길을 근심할 게 아니라 발자국을 저울질해야 하며, 혼자서는 주어/술어와 씨름하되 문밖에서는 미물에게조차 도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존 메이스필드를 처음 만난 것은 십오륙 세쯤이었던 것 같다. 이삼 년 전부터 이미 영어/수학은 물론 전 과목을 팽개치고 시에 몰두하던 터였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결과 더 이상의 진학에 대한 욕구마저 허물어져 고등학교와 대학이 빠진 채 대학원 사진만이 남아 있다. 그렇게 시만을 사랑한 대가로 나에게는 바위계곡을 타야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책읽기와 세상 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신발에 선혈이 고였다. 배우자를 만나는 일에서부터 어느 것 하나 학력의  조롱을 받지 않았던 부분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이 소 같은 눈 하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골라주었기에 근근이나마 여태껏 시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혼인 전에 나는 두어 종의 일도 해 보았다. 넉넉지 못한 농부의 딸이 처녀 시절을 음풍농월만으로 까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그 때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시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객지에서 아득히 ‘바다가 그리워’를 읽는 심경… 내 고향이 바닷가는 아니지만 그 구슬픔과 감동이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훨씬 자란 뒤 다른 번역본을 접해 보기도 했으나  말의 맛이 앞엣것만은 못하였다. 물론 그 때에도 내가 덜 된 데가 있어 책을 모조리 베끼지는 않고 맘에 드는 것만을 따 두었다.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지” 하는 독백조(獨白調)에서부터 “방향을 가려 줄 별 하나… 흰 구름 날리는 바람 부는 날씨와 튕기는 물보라… 울부짖는 갈매기만 있으면 그만이어라… 내 오직 원하는 것… 껄껄거리는 친구 녀석의 신나는 이야기와… 고요한 수면… 달콤한 꿈…” 이 세상 누구의 삶이 각별하지 않으리요, 마는 내가 걸어온 길은 저승에 가더라도 요요히 살아 있을 것만 같다.

   만일 서투른 배우가 너무 오랜 동안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다면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겠지. 화사첨족(畵蛇添足)은 접어두고 다시 삶과 시의 줄거리로 돌아가자. 언젠가 우연한 자리에서 한 친구가 “문채를 가지면 다 가지는 거”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문채! 문채란 어떤 것일까? 나 자신은 어떤 문채의 씨앗을 쥐고 태어났을까? 그 문채를 어떻게 키워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괴테는 『시와 진실』에서 “단점만이 개성이 될 수 있다”고 했고,  청나라 때 시․서․고문에 능했던 인화 사람 모치황(毛稚黃)도 “대나무는 죽순이 나오기도 전에 밑동과 마디를 이미 갖추었으니, 이는 한 치 한 치 자로 재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했다. 다만 긋지 않고 살고자 해야 할 것이다. 살고자 한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긴다. 환경과 생활이 어찌 주어지든 그 안에서 몸 세워야 한다. 잘 걸러진 어둠과 다독거린 기쁨만이 잉크병 속에 오롯이 빛으로 고여 때를 기다려 줄 것이다.

   『중국고전시학』‘연의(煉意)’ 쪽을 보면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한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다루는 솜씨야 종이 위에서 얻어낼 것이지만 뜻과 이치와 상상력은 현실의 삶에서 구해야 하는 것. 또한 삶이란 요청에 의해서 오는 게 아니고 많은 부분이 자의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까닭에 평소 생활 속에서 인내하고 꿈꾸며 얻어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문채를 얻는 일이 어찌 죽순의 마디처럼 저절로 되겠는가. 모치황이 말하는 죽순은 영감, 혹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천품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을 성싶다. 죽순은 말 그대로 자연이지만 시는 작(作)․품(品)이다. 꼬물거리는 영감을 잘 가꾸어내기 위해서는 정원사의 가위질을 습득해야 한다. 그 옛날 허난설헌도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하고, 서양의 누군가는 소설 하나를 이백 번을 고쳐 썼다고 하지 않는가.

   혹, ‘바다가 그리워’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나머지 공들이지 않고 얻은 게 아닐까 의문할 수도 있겠기에 몇 마디 덧붙이려고 한다. 다듬지 않은 나무토막이 매끈할 리 없고, 솔기가 보이지 않는 바느질 솜씨가 단박에 얻어졌을 리 없다. 설령 이 시가 한 번에 씌어졌다할지라도 그 이전에 이미 갈고 쪼은 시간들을 짐작해야 할 것이다. 중국고전시학에서 제시한 네 종류의 높은 경지는 물론이요, 세속적 구차 또한 느껴지지 않는 이 시는 철학의 품까지도 아우른 생명이 아닐 수 없다.

                   

   백지 위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 한 인간이 태어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이 지적 성인이 되기까지 가해지는 추고는 엄청나다. 맹자는 사람이 본래 착하다했고, 순자는 악하다했지만 내 생각에는 어둡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어둠에서 모든 오류가 발생하니까 말이다. 착함마저도 악의 선상에서 드러나는 다른 색깔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착함보다도 한 계단 위의 순수를 지향하는지 모른다. 거듭 언급하거니와 무수한 반성 끝에 한 인간이 모양새를 갖추게 되듯이 시 또한 무수한 탁마를 거쳐야 할 것이다.  일필휘지! 물론 그리했어도 시가 좋다면야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시가 일생에 몇 편이나 얻어질 것이며, 망치로 한 번 쳐서 부서져버리는 것이라면 썼다는 사실 외에 무슨 획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해머로 내리쳐도 다치지 않을 시를 구워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하루 이틀에 될 일도 아니요, 막무가내로 생애를 바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우리는 그 보배가 어느 붓두껍 속에 숨어 있는지 헤아려 볼 수조차 없다. 그런 것을 위하여  허둥대거나 자아를 여미지 않는다면 회사후소의 흰빛에서부터 그른 일이다. 시보다는 사람이, 평상심이 시심일 것을 먼저 기도해야 하리라. 얼굴의 생김생김이야 우리의 의지 바깥이니 유념할 바 아니지만, 그 얼굴에 담긴 표정이야말로 후천의 소산이므로 마음 써야 할 시집이다. 얼굴은 까막눈의 초부라 해도 읽을 줄 안다. 그 시야말로 한 자 한 획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내 삶의 어둠 속에서 방향을 가려주었던 별 하나, 오래된 공책을 다시 한 번 쓰다듬는다.

   나에게 시는 오늘도 낭떠러지에서 붙잡은 유일의 나뭇가지다.

 

   *『애지』2002-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