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정숙자
사랑이라는 음계에 손을 넣으면 피가 묻어 나온다. 사랑이라는 성전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다가가 보면 황홀하고 문을 열면 사라진다.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색이 빨강․노랑․파랑이라면 사랑에는 그리움․외로움․기다림의 원소가 있을 것이다. 이 삼원소는 사랑 안에서 빚어질 수 있는 행불행의 모든 파장을 지니고 있다. 그 현란한 굴곡에서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사랑은 아픔을 축으로 한다. 태초의 인간 아담조차도 이브를 얻기 위하여 갈비뼈 하나 들어내지 아니했던가.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이 점 너는 확실히 해야 해.
너는 갇혀 있느니라,
내 마음속에:
그 열쇠는 달아나 버렸으니:
너는 영원히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 않을 수 없어라.
-무명시가(無名詩歌)-
이 시는 중세 독일시 중의 하나다. 중세는 대체로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종료 내지 서(西)로마 제국의 멸망(476)에서부터 문예부흥기(16세기 초반) 이전까지의 기간, 그러니까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까지로서, 고대 문화와 기독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독일 중세문학을 논할 때, 그 진수는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중엽에 이르는 중세 황금기(1170~1230)로 잡는다. 중세 궁중서정시의 벽두에는 비교적 짧은 시가 유행했으며, 이 시 역시 소박하고도 짧은 언어로 구사되어 있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아득한 세월 저쪽에서였다. 시를 꼼꼼히 뜯어보지 않던 시절, 문장 강화에 대해서도 마음 쓰지 않았던 시절, 감동이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시가 두고두고 더 큰 감동을 주는 걸 보면 좋은 시는 세월과 함께 늙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을 확보하는 것 같다. 잡담 제하고 단숨에 토해낸 듯한 진지(眞摯) 우직(愚直) 담박(淡泊) 등이 경이롭고도 경건하다.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발생적인 넘쳐흐름”이라고 윌리엄 워즈워드는 규정했는데 이 무명시가야말로 그 이론을 싹트게 한 눈이 아닌가싶을 정도다. 본질의 주변을 맴도는 미사여구의 장문보다 진실된 한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것은 참다움이 곧 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무명시가가 진정성에만 역점을 둔 구어체의 것도 아니다. 치밀하게 문어적이다. 프리뉴스 2세는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일상에서 금기시하는 거짓을 뜻함이 아닌, 은유의 필요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마음을 가둘 수 있는 “열쇠”가 어디 있을 것이며, 덧붙여 그 “열쇠”가 달아났다고 하는 거짓말은 시만이 누릴 수 있는 상상력과 은유의 위용이다.
더욱이 이 무명시가의 소박한 행간들은 망설임 또는 애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중을 확인하는 맹세이며 서약이다. 시의 여러 유형 중에서 이 시는 단형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단형시는 촌철살인적인 표현을 획득해야만 한다. 짧은 문장 속에 읽는 이의 폐부를 기습/제압할 칼날이 들어 있지 않다면 그 시는 무의미하거나 패배다.
또한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가야 한다(호라티우스의『시법』)” 고전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새롭고, 새로운 것은 고전으로 돌아갈수록 참신하다. 21세기의 시라고 해서 고전의 품격을 도외시한다면 중량미를 시험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는 항상 시간의 주춧돌 아래 위치한다. 과거가 이룬 기초 안에서 변화가 시도될 때, 현대는 또 먼 미래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빛나는 한 편의 시는 국보(國寶)이며 소실되지 않는 유산이다. 깊은 철학자가 아니고서 위대한 시인이었던 사람은 없다고 한다. 사랑 또한 나름대로의 철학이거나 천성의 결과일 것이다. 한 순간일지라도 시와 사랑을 어찌 유희할 수 있겠는가. 속전속결이라는 전쟁용어가 연애용어로 들리는 요즘 이 글의 앞부분에 놓인 무명시가는 시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좌표를 제시하는 듯 보인다. “…너는 갇혀 있느니라, 내 마음속에: 그 열쇠는 달아나 버렸으니…” 작자 미상의 이 시는 연애시의 첫째 요건인 진정성과 단형시의 토대를 두루 갖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진입로가 아름답지 않은 사랑은 없다. 사랑에 마악 들어선 이들은 안내자 없이도 능히 홍예다리를 건넌다. 문제는 돌아 나오는 길이다. 어느 날, 나는 어느 사잇길에서 레이서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함께 달리는 길은 지상이면서 동시에 고공이었다. 그의 말씨는 부드럽고 풍요로웠으며, 그의 눈은 깊디깊은 바다를 담고 있었다. 나는 운명을 저당하고 그와의 하늘을 샀다. “너는 내 것…”으로 시작되는 무명시가를 그에게 바친 것은 물론이었다. R.M.릴케의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C.G.로젯티의 “내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사랑하는 그대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랠랑 부르지 마오” 등등 숨결이 간절한 시편들을 편지마다 담아 보냈다. 사랑하는 이들은 인간을 초월한다. 몸에도 마음에도 날개가 돋친다. 온 세상은 그들을 위해 아침과 밤을 마련하고, 수천억 개 별로 이루어진 은하수도 그들의 대화 곁에 조용조용 흘러간다.
그러나 나는 레이서의 연인답게 곧 내던져지고 말았다. 시속을 잴 수 없을 정도로 달리는 바퀴 위에서 내팽개쳐진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부서진 심신과 쏟아진 피의 양을 모를 것이다. 삼원소의 작용을 모를 것이다.
연애는 공기처럼 또는 구름처럼 우리의 주변을 떠돈다. 모든 사랑은 아름답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작별만큼은 그렇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고 했지만, 나는 ‘끝이 좋아야 모두 좋다’라고 바꾸어 읽는다. 플로베르가 『감정교육』을 썼듯이 우리의 교실에도 애정강의가 도입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연애는 거의 모든 이가 겪는 과정이고, 이별은 피 흘리는 항목이다. 그로 인해 운명이 뒤엉키며, 어떤 이는 죽음에까지도 이른다. 정신과 연결되지 않은 성교육, 이 얼마나 말초적인가. 만남이야 어찌해도 아름답지만 작별만은 그렇지 않다. 지혜를 배우고 익혀 지구의 우울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연애는 내면을 지배하고, 내면은 현실을 지배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으며, 없는 것은 아주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물심의 모든 현상은 시시각각 생멸 변화한다. 모두가 고통일 뿐, 생로병사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원한다고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나를 떨치고 간 레이서도 배려가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그런 식의 작별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와 나를 내려 주었을 것이다. 추억의 상자를 함께 묶어 주었을 것이다. 만날 때 못지않게 향긋한 작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자 안의 추억은 보석이 되었을 것이고, 무명시가를 함께 외우던 하늘은 내내 청명하였을 것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차는 것은 하느님의 가슴을 차는 일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게 하는 일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남몰래 삼킨 눈물은 하느님의 가슴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를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일은 하느님을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일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므로… 내 안에 하느님이 산다고 믿느니보다 나에게 미소 지어주는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나는 더 믿는다.
만약, 당신에게 새로 사귄 애인이 있거든 그의 눈을 들여다보라. 방금 전에 하느님의 가슴을 발길질하고 달려온 레이서가 아닌지. 하느님의 오른쪽 가슴을 무너뜨리고 왼쪽 가슴으로 옮겨온 레이서가 아닌지. 피 흘리는 하느님을 돌아보지 않고 날아온 레이서가 아닌지. 만약, 당신에게 새로 사귄 애인이 있거든 그의 입술을 들여다보라. 달콤한 말들 사이사이에 하느님의 근심이 묻어 있지 않은지. 한 사람에게 냉혹한 사람은 백 사람에게도 그러하리니… 그 누구도 사랑 앞에서 선수일 필요는 없다. 참다운 사랑의 자세란 사랑이 식어갈 때 사랑하는 일이다. 그의 매력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의 느낌에 불과한 매혹으로써가 아니라 의지로써 사랑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으로 채운 “열쇠”를 가벼이 풀어버리려 하지 않는 일이다. 풍조가 아무리 생각의 속도로 달린다 해도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데워줄 햇살은 진실한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신국神國』에서 우리에게 권유한다. “자유의지의 오용에서 온갖 불행의 쇠사슬이 생겼다. 자유의지를 사랑이라는 마을에서 오용하지 말자. 올바른 의지는 선한 사랑이다. 선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살아 있는 성전이다”라고. 남용된 자유의지가 능력인 양, 멋인 양 할 때 당신은 신의 축복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따라 온종일 바람이 불고 간간이 눈발이 섞인다. 이런 날 나비가 나는(飛) 언덕이 몹시도 그리워진다. 그리스 신화에서 갖은 고난에 의해 정화된 후 영원불멸의 신이 된 에로스의 아내 프시케, 그 상징으로서의 나비! 헤르만 헤세는『나비』라는 저서에서 나비를 “덧없음”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덧없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 저기 저 창공의 셀 수 없이 많은 별조차도 늘상 거기 고정되어 있으므로 우리들 삶보다 아름답지 않다. 우리의 청춘,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은 덧없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허무의 개념을 환기시켰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끔씩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소묘(素描)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처럼 다리를 벌리고 서서 양팔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본다. 그리고 오른쪽 손끝에서 오른쪽 발끝으로, 왼쪽 손끝에서 왼쪽 발끝으로 선(線)을 잇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그대로 한 마리 나비가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공기와 꿈』에서 “활동하는 것도 상상력”이라고 언급했다. 인간의 수족은 손발이기 이전에 날개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너는 일도 나는(飛) 일이다. 팔과 발 사이에서 접혀졌다 펴졌다 하는 날개가 느껴지지 않는가. 신(神)은 우리 인간들의 편리를 위해 거치적거리는 단면을 투명처리 해주었을 뿐이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노래 부르던 시절, 우리는 이미 날개를 저어보았던 것이다. 유년의 자유 속에서, 그리고 사랑 속에서 빛나던 날개. 외부로의 도약이나 도피의 기구가 아닌 순수와 기쁨이었던 날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의 포즈를 취할 때면 나는 오십오 킬로그램의 체중을 벗어난다. 일생에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영원히 영어의 몸”이 되어버리는 나비! 두 번의 키스조차 있을 수 없는 나비의 사랑을 나는 선망하는 것이다.
그가 갔다고 해서 나도 그를 잊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픔이 앎이 되고 앎이 성찰의 바탕이 되어지므로 좀더 맑고 따뜻해진 내 안에서 그는 여전히 소중한 별자리다. 오늘처럼 바람 부는 날, 눈송이가 창틀에 내려앉는 날 옹이 고운 추억의 상자를 열자. 행복했던 날의 옷자락으로 긴긴 밤과 거친 길들을 덮자. “그는 내 마음속에: 갇히었으니: 그리고 그 열쇠는 달아나 버렸으니:”
*『애지』2003-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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