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시기(作詩記)
정숙자
시를 아는 사람은 시로 사람을 취택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은 명성으로 시를 취택한다.
-백곡 김득신
가난은 블랙홀이죠. 은행장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두께
가 육중한 공책을 사고 첫 장에 떠억 간판을 걸었지요. 「생
각은행」 총총히 저축했습니다. 이슬비든 는개든 소나기든 다
집어넣었죠. 계절이 쌓이는 동안 잔고가 불 어나더군요. 막막
한 날 출금합니다. 남모르는 꽃이 나비가 구름이 강물로 흐르
는 초원. 때때로 별이 뜨기도 합니다. 인터넷뱅킹도 하냐고요?
웬 걸요. 철저히 오프라인입니다.
오래 전 어느 스님시인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배를 타고 바
다를 건너는 중이었답니다. 낯선 여인이 다가오더니 “혹시
○○ 시인님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어떻게 저를……” 머
뭇거리자, “스님의 시를 읽었어요.” 기쁨을 추스르지 못하더
랍니다. 스님시인은 당시의 행복을 어루만졌습니다. 진정한
독자는 작자가 모르는 독자라고, 그 독자를 만나야 진짜 독자
를 만나는 거라고…… “글 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기쁨 있
으니 짓는 즐거움, 발표하는 즐거움, 독자를 만나는 즐거움이
라고…… 저는 거기 이름 붙였습니다. 「文人三樂」 뒤집으
면 곧바로 문인삼고(文人三苦)가 보이지요, 만
시를 통해 세상을 읽죠. 세상을 통해 시를 읽고요. 시인에게
기댈 곳 있을까요? 알에서 깨어나는 일, 광장 바라보는 일, 굴
곡을 맞이하는 일 모두가 벼랑입니다. 삐끗하면 천 길 미궁이
에요. 저는 가끔 울었습니다. 울고 싶진 않았지만 그저 눈물이
나오던 걸요. 그래도 생후 50년, 등단 20여 년 잘 견디고 있
습니다. 비결이요? 「독야청청」. 그것만이 유산이었어요.
만건곤한 그늘 말고는 다른 밑거름 얇았으니까요.
-『문학나무』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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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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