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나의 작시기(作詩記)/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1. 14. 14:59

 

 

       나의 작시기(作詩記)     

 

       정숙자

                            시를 아는 사람은 시로 사람을 취택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은 명성으로 시를 취택한다.

                                                           -백곡 김득신

 

 

    가난은 블랙홀이죠. 은행장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두께

가 육중한 공책을 사고 첫 장에 떠억 간판을 걸었지요. 「생

각은행」 총총히 저축했습니다. 이슬비든 는개든 소나기든 다

집어넣었죠. 계절이 쌓이는 동안 잔고가 불  어나더군요. 막막

한 날 출금합니다. 남모르는 꽃이 나비가 구름이 강물로 흐르

는 초원. 때때로 별이 뜨기도 합니다. 인터넷뱅킹도 하냐고요?

웬 걸요. 철저히 오프라인입니다.

 

   오래 전 어느 스님시인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배를 타고 바

다를 건너는 중이었답니다. 낯선 여인이 다가오더니  “혹시

○○ 시인님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어떻게 저를……”  머

거리자,  “스님의 시를 읽었어요.”  기쁨을 추스르지 못하더

니다. 스님시인은 당시의 행복을 어루만졌습니다. 진정한

독자는 작자가 모르는 독자라고, 그 독자를 만나야 진짜 독자

를 만나는 거라고…… “글 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기쁨 있

으니 짓는 즐거움, 발표하는 즐거움, 독자를 만나는 즐거움이

라고…… 저는 거기 이름 붙였습니다. 文人三樂」 뒤집으

곧바로 문인삼고(文人三苦)가 보이지요, 만

 

   시를 통해 세상을 읽죠. 세상을 통해 시를 읽고요. 시인에게

기댈 곳 있을까요? 알에서 깨어나는 일, 광장 바라보는 일, 굴

곡을 맞이하는 일 모두가 벼랑입니다. 삐끗하면 천 길 미궁이

에요. 저는 가끔 울었습니다. 울고 싶진 않았지만 그저 눈물이

나오던 걸요. 그래도 생후 50년, 등단 20여 년 잘 견디고 있

습니다. 비결이요? 독야청청」. 것만이 유산이었어요.

건곤한 그늘 말고는 다른 밑거름 얇았으니까요. 

    -『문학나무』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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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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