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
정숙자
가을에 태어난 나는 이듬해 봄부터 개구리소리를 듣고 자
랐다. 과르륵~ 과르륵~ 들판 가득 노래를 파종하는 개구리
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흙을 깨웠다. 몸통의 90%나
되는 뱃심으로 풀어내는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푸근했다.
“압정 4개, 그리고 개구리 한 마리씩 잡아올 것.” 생물 시
간 과제가 떨어졌다. 헉! 징그럽고 무서웠지만 오동통한 갈
색개구리 한 놈을 덥석 잡아 상자에 넣었다. 책가방과 개구
리 상자와 나는 고래고래 석탄가루 날리며 달려온 통학차
를 탔다.
“개구리를 꺼내라. 머리를 쳐라. 책상에 눕히고 네 발에
압정을 꽂아라. 연필 깎는 칼로 배를 찢어라. 심장을 봐라.”
중1. 우리 교실에선 비명과 웅성거림이 새파랬다. ‘죽은 후
에도 한동안 펄떡이는 심장’을 가르치려고 산목숨을 사용(!)
했던 것.
45년 전 교육효과가 요즘 들어 생생하다. 중1 교실에서
매해 그 실습? 아, 아찔하다. 모형 개구리의 생산-보급이 시
급하다. ‘죽은 뒤에도 한동안 펄떡이는 심장’이 핵심이다. 과
거의 생물시간으로 보내야겠다. 기억을 치료해야겠다.
생명과 용서를 구하는데 내가 꼭 3차원 인간일 필요는 없
다. 무참히 목숨을 뺏긴-뺏길 개구리들을 살려야겠어. 꽈르
륵~ 꽈르륵~ 볼때기 미어지는 맹꽁이도 한몫 끼어들던 모
내기 철 시골 저녁을, 득음명창의 본산을 길이 지켜야겠어.
-『들소리문학』2009년 여름(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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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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