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고독 강점기 외 1편/ 김영찬

검지 정숙자 2024. 11. 29. 02:46

 

    고독 강점기 외 1편

 

     김영찬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심각할 것까지 없고

 

  허리 꺾어 8부 능선 더듬다가 문득 잉크 묻은 손톱 밑 내려다보니

  나에게 고독 강점기라는 게

  있기는 있었네

 

  토리노에 대해서 알긴 뭘 알아 돌아서려다가

  오른손 잠깐 뻗어

  하복부 저점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파베세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대퇴부 골짜기 홈 패인 곳마다

  무덤을 쌓고 있었네

 

  트리노에 대해서가 아니겠지 코나투스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체자레 파베세의 옆얼굴 훔쳐보며 뒤적뒤적

  가로등 꺼진 그 골목길

  

  나에게도 분명 분명히 고독 강점기라는 게 

  옹이 박혀 있었네

      -전문(p.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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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밤은 리스본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 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끈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샐 생각일랑 아예

  접어둘 것

 

  그렇고 말고 오늘처럼 과달키비르강이 소리 없이

  강물 수위를 높이며 시종일관

  침묵을 고집할 때

  리스본의 매력은 무섭도록

  관능적일 수밖에

 

  달콤한 밤공기가 맨발의 우리들을 달빛 젖도록 사주할 테니

  그래, 우린 몰도바를 향해 출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척

 

  남은 생애를 몽땅 대책없는 리스본의 창가에서 어기적거리다가

  옹골차게 우량한 쌍둥이들이나 뭉텅뭉텅

  낳게 된들 누가 어쩌랴

 

  리스본까지만, 제발 더 멀리 떠나서 탈이 될

  헌책방의 책들일랑

  뚜껑 닫아버리고

 

  오늘 밤엔 리스본까지만, 리스본의 품 안에 안겨서

  오늘밤은 리스본

     -전문(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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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늘밤은 리스본』에서/ 2024. 11. 27. <황금알> 펴냄

 * 김영찬/ 2002년『문학마당』으로 등단, 시집『불멸을 힐끗 쳐다보다』『투투섬에 안 간 이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