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강점기 외 1편
김영찬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심각할 것까지 없고
허리 꺾어 8부 능선 더듬다가 문득 잉크 묻은 손톱 밑 내려다보니
나에게 고독 강점기라는 게
있기는 있었네
토리노에 대해서 알긴 뭘 알아 돌아서려다가
오른손 잠깐 뻗어
하복부 저점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파베세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대퇴부 골짜기 홈 패인 곳마다
무덤을 쌓고 있었네
트리노에 대해서가 아니겠지 코나투스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체자레 파베세의 옆얼굴 훔쳐보며 뒤적뒤적
가로등 꺼진 그 골목길
나에게도 분명 분명히 고독 강점기라는 게
옹이 박혀 있었네
-전문(p.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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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은 리스본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 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끈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샐 생각일랑 아예
접어둘 것
그렇고 말고 오늘처럼 과달키비르강江이 소리 없이
강물 수위를 높이며 시종일관
침묵을 고집할 때
리스본의 매력은 무섭도록
관능적일 수밖에
달콤한 밤공기가 맨발의 우리들을 달빛 젖도록 사주할 테니
그래, 우린 몰도바를 향해 출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척
남은 생애를 몽땅 대책없는 리스본의 창가에서 어기적거리다가
옹골차게 우량한 쌍둥이들이나 뭉텅뭉텅
낳게 된들 누가 어쩌랴
리스본까지만, 제발 더 멀리 떠나서 탈이 될
헌책방의 책들일랑
뚜껑 닫아버리고
오늘 밤엔 리스본까지만, 리스본의 품 안에 안겨서
오늘밤은 리스본
-전문(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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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오늘밤은 리스본』에서/ 2024. 11. 27. <황금알> 펴냄
* 김영찬/ 2002년『문학마당』으로 등단, 시집『불멸을 힐끗 쳐다보다』『투투섬에 안 간 이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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