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편지 외 1편/ 이화영

검지 정숙자 2024. 10. 26. 01:21

 

    편지 외 1편

 

     이화영

 

 

  꽃들의 숨소리가 잦아들면 저들은 더 이상 사늘을 보지 않습니다

  잠시 보폭을 느리게 하며 땅으로 가는 시간입니다

 

  아가의 옹알거림은 젖내 나는 부드러운 주파수입니다

  믿음은 수치보다 감정이 우선이라고 사각사각 연필은 전해 줍니다

  모든 생각을 사물의 외곽으로 옮기고 K지구에 있는 애인에게 편지를 씁니다

 

  보고 싶소 몸의 위치가 까마득하오 약속은 없소 마음을 따라갈 뿐이오 흑연 향을 따라나선 길이오 불행하시오 그래야 우린 만날 수 있소 하늘도 귀신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 정이오

 

  불안하면 무엇이라도 씁니다 'ㅂ'을 쓰고 나서 'ㅏ'를 넣을까 턱을 굅니다 누군가에게 들킨 듯하여 가만 공책을 덮습니다 먼 기러기 발자국을 세며 간서치*가 되어 계절을 날까 합니다

     -전문(p. 84)

 

    * 간서치: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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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엄마는 약을 드시고 계속 잠만 잤다

  악몽을 꾸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작나무 뼈처럼 창백한 몸에

  하루에도 옷을 몇 차례 갈아입히고

 

  고집스럽게 기저귀를 거부해서

  바지를 내리는 순간 지린 꽃 피었다

 

  목욕을 시키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투에

  완전 복장을 입혔다

 

  시공간을 잊고

  사람을 잊고

  자신의 정체성까지 잊고

  광야에서 홀로 마주한 세상 끝의 얼굴

 

  엄마에게 출구 전략이 있을까

  어느 문을 나서고 있는지

  비 내리고 춥다

 

  낡은 문갑 위에

  이름 모를 분홍 조화

  말 없는 꽃은 이쁘다

 

  한 방에 이불을 펴고 눕는다

  이불을 덮어 주며 토닥거려 주던 손길이 없다

 

  엄마

  내일은 진달래밥 지어 드릴게요

      -전문(p.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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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에서/ 2024. 10. 4. <시작> 펴냄

 * 이화영/ 1965년 전북 군산 출생,  2009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 시집『침향』『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