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흠 없는 사과가 있었다 외 1편
지관순
한계를 모를 땐 누구나 향기롭지
한번 움켜쥐면 내려놓기 힘든 붉고 아삭한
둥긂이어서
너는
손아귀에 스며들기 좋아하지
다른 속도로 깊어가는 속살에게 애원하기 좋아하지
살금살금
우글거리는 고충을 피해 다니다가
손금 밟히기도 하지
어디서부터 사과입니까
꼭지를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하나둘 모여드는
느린 사과 덧칠한 엎질러진 사과 우유부단한 사과
중얼중얼 범람하는 사과
어떻게 실현됩니까 사과는
누군가 중심을 쪼개려고 와락 달려들지
나는 단단히 쥐고 있지
사과에 사활을 건 사과 사흘 안에 부활을 꿈꾸는 사과
둥긂과 와락 사이에 사과나무가 서 있었지
-전문(p.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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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수요일의 우체부가 버찌를 꺼낸다
푸른 잉크로 쓴 편지봉투 속에서
황소자리와 전갈자리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어디로든 닿지 않는
새벽 두 시
스물여섯 번이나 빗나간 예측과 성급하게 익어버린
열매가 가야 할 길
이제 눈을 떼도 될까
부풀다 번져버린 것들 밑줄 짓이겨진 것들
다 써버려 남아 있지 않은 것들
때문에
황홀하다 버찌의 생일날 날아든 키스!
다 읽어버릴 테야
박쥐우산이 서른두 번 뒤집혔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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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에서/ 2024. 10. 19. <달을 쏘다> 펴냄
* 지관순/ 2015년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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