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정미주_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 스무고개 : 신동옥

검지 정숙자 2024. 7. 31. 01:43

 

    스무고개

 

     신동옥

 

 

  모두 떠나는 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

  집이 없어서 헤매는 게 아니라 헤매다 보니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진 집

 

  당신이 대문에 가위표를 그리자

  마법처럼 지워진 집 이 빠진 우체통에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고 문짝이 뒤틀리고

  유리에 금이 가고

 

  보풀 날리는 낮은 처마를 돌아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서 살기 지겨웠나

  여기서 죽기 두려웠나 모두 모두

  묻어두고 떠나는 집

 

  덩굴장미 남천 줄기를 흔드는 눈보라에

  도깨비들 춤추는 집 무말랭이 콩자반 거름에

  짠 내 나는 구름이 뭉개고 앉은 

  마당 구석 웃자란 사과나무

 

  홀로 언젠가 제 둥치에 잠들었을

  당신을 기억하는 듯 버려진

  화단을 점령한 꽃들은 밤에도

  달빛을 끌어모으는데

 

  나무에 등을 대고 키를 새겼지

  금 그어놓은 자리에 송진이 흐르고

  옹이가 지고

  버섯이 돋았다 그날

 

  정수리 위아래로 두 개의 당신이 태어나서

  반쪽 심장을 사과나무 둥치에 묻은 다음

  악수하고 돌아섰다 당신은

 

  대문 안에 또 다른 당신을 남겨 두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사연으로 집을 채웠다

  언젠가 아무도 이름 짓지 않은 당신이

 

  태어난 집 이름도 없이 저 혼자 태어난

  당신이 영영 숨어든 집 눈을 감고

  열을 센 다음 돌아선 당신이

  당신에게 돌아가는 집

    -전문, 『청색종이』 2023-가을호

 

  ▶ 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_정미주/ 시인

  참 이상한 일이다. 긴 시간이 지나 당신이 꿈에 나오는 일은. 당신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았고,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았다. 당신은 어른들에게는 남루한 어린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골목을 누비는 털이 딱딱해진 들개였다. 집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마을. 빈 골목에서 당신을 마주쳤을 때 당신은 길 위의 인사를 나누듯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꽃을 피우지만 열매는 끝끝내 미성숙한 채로 남는다는 식물을 보았다. 당신의 발아래 뿌리내린 작은 열매를 나는 여러 번 짓밟았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유다. 당신의 집이 어딘지를 모르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시인의 시를 읽고 이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무언가'로 대변되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옅은 체취를 좇으며, 당신들이 되어버린 발자국에 나의 발자국을 얹는다. '옹이가 지고 버섯이 돋았다 그날', '정수리 위아래로 두 개의 당신이 태어나서' '반쪽 심장을 사과나무 둥치에 묻은 다음 악수하고 돌아섰다. 당신은', 신동옥의 「스무고개」의 당신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사연으로 집을 채웠던' 길 위의 채록자이자, 저 혼자 돌아가는 슬픔의 오디세우스이다. 신화가 사라지자, 자본에 의한 옳고 그름만이 남았다. 오디세우스의 긴 표류는 예언된 것이었지만, 그를 타자화 하는 우리의 표류는 예견된 것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다. 고통과 방황의 이유를 발밑에 도사린 현재의 문제에서 찾으려 할 때 인간의 근원적인 비극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p. 시 232/ 론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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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1월(409)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작품론> 에서 

  * 신동옥/ 시인, 2001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악공, 아나키스트』등, 산문집『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 정미주/ 시인, 2023년 『현대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