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파종 외 1편/ 정우신

검지 정숙자 2024. 7. 3. 02:09

 

    파종 외 1편

 

    정우신

 

 

  내 머리에 꽃 피었는지?

 

  소각장에서 말했지

  어설피 때리지 말고 완전히 죽이라고

  장난을 장난으로 끝내면

  내가 죽을 거라고

 

  너의 판단은 늘 현명했던 것 같아

 

  친구야 난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후퇴한 듯해

 

  팬지에 검은자를 흘리고 간 것이

  난 너라고 믿는다

  마음이 약한 네가 마음이 더 약한 나에게

  들려줬던 말들

 

  계속 맞다 보면 주먹이

  검은 원으로 보이는데

  그럴 땐 더 움츠려서

  점이나 씨앗이 되라고

 

  가볍게

  더욱 가볍게

  치솟으라고

 

  친구야 넌 똑똑하니까

  답을 줄 수 있지?

 

  저 쥐새끼 같은 눈알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 말야

      -전문(p. 100-101)

 

   ------------------

    일용직 토끼

 

  

  아지랑이가 귀를 쫑긋 세우곤 태양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을린 털을 보여 주거나 검은 발바닥을 보여 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때때로 발생하는 산불이 나의 바뀐 눈동자에서 시작된다는 걸 왜 모를까.

 

                    *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정말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들었어?

 

  사랑을 해 보긴 한 거고?

 

  걸레를 삶는 일보단 아무래도 양털을 밀어 주는 편이 낫겠어.

 

  샤워를 해도 톱밥은 어딘가 남아 있고

 

  나무의 기본이 뭔지 몰라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렇다고 나무의 기분을 알고 싶은 건 아니고.

 

  이러나저러나 구원은 오지 않으니까. 아니 이미 낡은 것이니까.

 

  전통은 어디까지?

 

  섞어찌개 먹으며 토끼털 떠다니는 소주 마신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간단합니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I would prefer not to

 

  하지만 그게 편해요.

 

  왜 돈 없어도 돈 없는 일을 해요?

 

  파노라믹 옥상에 올라

 

  박하사탕 같은 안개를 물고 키스해요.

 

  시를 써서 아이를 키울 수 없지만

  돌반지를 팔아 시집을 사요.

 

  세상이 그런 거지 뭐. 아무 것도 아닌 거.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제일 커다란 일이 되는 거.

 

  여러분의 법은 무엇인가요?

 

  I would prefer not to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기분을 미루세요.

 

  사랑은 나중에 챙기시고.

 

                    *

 

  여러분, 흰빛을 본 적 있나요?

 

  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끌려 간 적 있나요.

 

  그 흰빛에 누워. 겨울 동안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과 부딪혀 녹아내리는 것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죽은 토끼의 소리가 들려오는 겨울이 있습니다.

      -전문(p. 21-24)

 

    *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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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미분과 달리기』에서/ 2024. 6. 20. <파란> 펴냄

정우신/ 1984년 경기 인천 출생,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비금속 소년』『홍콩 정원』『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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