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흔들바위 외 1편
심은섭
밀고 밀어도 추락하지 않는다
의심을 잔뜩 품은 바람 한 점이 바위 속을 들여다보았다 흠칫 놀란 표정이다 그 바위 속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암자 한 채가 보이고, 수행 중인 고승도 보인다 고승은 언제부턴가 세상 밖을 거부하며 바위 속으로 타고 들어갔던 사다리마저 부숴 버리고 산다 봄날, 그는 꽃들이 찾아와 바위를 흔들 때마다 터진 영혼을 수선하며 목어를 두드린다 꽃이여, 바람이여, 더는 저 바위를 흔들지 마라 저 바위를 흔들수록
너만 더 흔들릴 뿐이다
-전문(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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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하지 않는 e메일
창밖엔
달이 떠오르고
내 기억의 언덕으로 두 얼굴이 떠오른다
천상에 계신 아버지께 명절 쇠러 오시라고 e메일을 보냈다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조명이 휘황찬란한 천상 나이트클럽에서 러브 샷을 하거나 다방 마담이 건네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한량 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의심했다
지난해 유월쯤, 천국행 열차표를 예약하고 대기 중이시던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며 집을 나가셨다 역시 그 흔한 문자 한 통 없다 아버지를 찾다가 지친 어머니도 천상 카바레에서 지르박을 추고 있을 거라는 풍문이 파다했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노부부가 천국에서 오랜만에 만나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든, 공원 벤치에 앉아 백 년 고독의 성을 허물고 계시든, 아니면 반지하 사글세 방을 얻어 신방을 차리시든, 한 줄의 e메일이라도 보내 주었으며 좋겠다고······,
늦은 저녁에
두 개의 휴대폰 번호를 삭제하는 순간
시청에서 '미아' 접수 문자가 내게 날아왔다
-전문(p. 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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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물의 발톱 』에서/ 2024. 4. 12. <시작> 펴냄
* 심은섭/ 2004년『심상』으로 시인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8년『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당선, 시집『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시론집『비대상시론』, 평론집『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상상력과 로컬시학』, 편저『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너의 종이 되리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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