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검지 정숙자 2024. 5. 18. 02:00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담요처럼 쓸쓸함을 덮어쓰고 땡볕의 가로수 길을 걸었다

 

  땡볕도 가로수 잎도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사실은 손발이 시린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몸이 안 좋은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땡볕의 가로수 길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이 가까워졌다

 

  외로움은 기체여서 속속들이 스몄다

 

  외로움은 액체여서 계속 번져나갔다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걸을 힘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라 해도

 

  그것만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영영 처음일 것처럼

 

  쓸쓸함을 담요처럼 덮어쓰고 마냥 걸었다

     -전문(p.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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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스행 비행기는 오지를 않고

  그는 끝내 스위스에 가지 못할 테지

 

  알프스며 몽블랑이 눈에 선해도

  그의 관심은 오직 베른뿐

 

  베른의 의사들은 실력 있고 친절하지만

  그를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테지

 

  스위스행 비행기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도

  이번만은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도 문득 알게 되겠지

  베른의 날씨가 나빠서거나 공항에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걸

 

  그러다 차차 지켜볼 테지

  오랫동안 묵은 고통이 자신의 몸을 떠나가는 걸

 

  베른의 의사를 보지 않고도 그는 마침내 안락을 찾게 되겠지

  대성당의 종소리 같은 위로가 겹겹이 그를 에워싸겠지

     -전문(p.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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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에서/ 2024. 4. 22. <여우난골> 펴냄

  * 한명희1992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꽃뱀』『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두 번 쓸쓸한 전화』『시집읽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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