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물의 발톱/ 심은섭

검지 정숙자 2024. 5. 21. 02:17

 

    물의 발톱

 

     심은섭

 

 

  달에서 지구의 플라스틱 병이 발견되었다

  그 사실을 지구를 향해 황급히 타전했으나

 

  인류가 벌집의 애벌레를 털어 먹었고, 피조개가 소유했던 갯벌을 갈아엎고 세운, 공장 굴뚝의 연기를 들이마신 나팔꽃이 성대결절로 나팔을 불지 못해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산속 벌목공들의 톱질 소리에 숲들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산새들이 또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입에 거품을 물고 쓴 기사 하나 없다

 

  신문을 읽던 빗방울들이 치를 떨며 강가에 모여 완강한 쇠사슬의 스크랩을 짜고 황톳빛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발톱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 발톱으로 지상의 모든 길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어떤 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웠다 종족 번식을 위해 여름밤과 협상하던 달맞이꽃의 생식기마저 알뜰하게 거세하고 말았다

 

  온순한 물방울이 악어의 DNA를 얻으려고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표제작 『물의 발톱』은 '달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달에서 지구의 플라스틱 병이 발견되었다"는 우주 생태계의 "타전"이 그것이다. 달의 몰락은 급기야 지구의 몰락으로 전이된다. "공장 굴뚝의 연기를 들이마신 나팔꽃이 성대결절로 나팔을 불지 못해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 "산속 벌목공들의 톱질 소리에 숲들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사실을 "산새들이 또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입에 거품을 물로 쓴 기사 하나 없다", 그래서 "신문을 읽던 빗방울들이 치를 떨며 강가에 모여 완강한 쇠사슬의 스크랩을 짜고 황톳빛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떤 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웠다", "달맞이꽃의 생식기마저 알뜰하게 거세"당했고, "지상의 모든 길을 집어삼"킨 "온순한 물방울"은 "악어의 DNA를 얻으려고/ 아프리카로 떠났다"의 시구들은 지구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구체적 몰락의 서사이다. (p. 시 73/ 론 106-107) <이성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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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물의 발톱 에서/ 2024. 4. 12. <시작> 펴냄 

  * 심은섭/ 2004년『심상』으로 시인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8년『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당선, 시집『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시론집『비대상시론』, 평론집『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상상력과 로컬시학』, 편저『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너의 종이 되리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