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대유목 시대/ 한명희

검지 정숙자 2024. 5. 18. 01:41

 

    대유목 시대

 

     한명희

 

 

  나의 땅이 아니니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의 대통령이 아니니

  투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한다지만

  나의 신이 아니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국경 근처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합니다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방향을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유목민이고요

 

  그들을 따라

  핸드폰과 노트북을 챙깁니다

 

  어디까지든 가볼 참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제목인 "대유목 시대"는 '디지털 노마드'를 지칭하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이버 세계에서는 국가가 지배하는 영토도 없고 신을 모셔야 할 사원도 없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유로운 세계를 항해한다. 시인이 "투표하지 않"고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노마드의 세계에 아나키스트로 주유하고자 하는 소망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핸드폰과 노트북"이라는 쓰기의 도구가 필요하다. 시인은 이 쓰는 행위를 통해 "어디까지든 가볼"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는 자이다. "국경 근처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합니다"라는 구절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우리는 경계에서 항상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넘어설 때의 처벌을 두려워한다. 그 경계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넘고자 하는 자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며 그곳을 넘자고 우리를 유혹한다. 경계는 사실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 가상의 억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 시 13-14/ 론 133) <황정산/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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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에서/ 2024. 4. 22. <여우난골> 펴냄 

  * 한명희/ 1992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꽃뱀』『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두 번 쓸쓸한 전화』『시집읽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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