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을 보러 갔다
꽃나무는 눈을 내리감고 제 발등에 펼쳐진 고요를 보고 있었다
한 걸음 꽃그늘을 디딜 때마다 붉은 고요가 피었다가 사그라졌다
꽃을 밟고는 못 건너가겠다고 딸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꽃송이를 하나하나 주워 올렸다
꽃을 올린 두 손바닥은 오므린 꽃잎이 막 벌어지는 꽃 한 송이
꽃향기가 손금을 따라 붉게 번지고 고이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시간이 고요 속에 앉고
바닥도 없이 층층이 바닥이었던 나의 붉은 시간도 앉아
웃음도 뎅컹, 울음도 뎅컹,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송이를 주워 들었다
눈부신 바닥의 암흑만을 딸에게 주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데
밟을 수 없는 꽃송이 하나하나 나란히 줄 세우고 붉게 내린 고요를 건너오는 딸
눈앞엔 바닥이 없는 붉은 고요만 가득하다
-전문(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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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잉크로 쓴 분홍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어 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곽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을 보여줄 때
그 분홍문장 내게 고여 반짝이던 시간이
그 분홍문장 당신 입술에 고여 노래하던 시간이
이미 다 지나가고 허물어져
졍 깊은 여자가 바라보던 수십 겹 물결무늬와
그 여자 바라보던 남자의 수십 겹 눈물무늬엔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문장에 엎질러진 먹물,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문장만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문장을 탁본한다
-전문(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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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검은 잉크로 쓴 분홍 』에서/ 2024. 4. 28. <북인> 펴냄
* 강미정/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타오르는 생』『물 속 마을』『상처가 스민다는 것』『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외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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