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검지 정숙자 2024. 5. 9. 01:11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왼쪽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딸아이가 돌아왔다

 

  웃다가 들킨 낮달 혼자만 바깥에 세워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도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던 울음을 낚아채고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마늘을 까거나 알밤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날개가 없었지만 자주 모여 밥을 비벼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말들이 귀신처럼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온 여름 혈서만 쓰다가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 연탄아궁이 하나에 찬장 하나가 전부였던 부엌, 연탄재를 들고 청소차를 따라가다 엎어졌는데 아픈 곳 하나 없는 기억, 마당 수돗가에서 비 맞으며 설거지와 빨래를 해도 손 시리지 않던, 지금은 희미해진 동네가 있었다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이제 겨우 미안하기도 한

     -전문(p.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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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는 내리고

 

 

  대한을 앞두고 비 오신다

 

  적반하장을 버무린 말들이 둥둥 신파조로 떠다닌다

 

  슬픔은 왜 눈가에 맺혀 하나같이 둥글어지는지

  왜 구체적이지 않고 그냥 두루뭉술해지는지

 

  어제는 얼마나 소용없는 말들로 가득한가

 

  지금은 또 얼마나 젖어 구체적이며 소중한가

 

  무언가 알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이미 세상은 깊은 강물에 속한 숱한 빗방울들

  강물도 때로는 돌아보고 싶은 물방울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부유하되 불행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나여서, 내리는 비 같아서

  

  누군가를 다독여주는 빗소리처럼

  바흐의 무반주 첼로 음이 공중으로 떨어진다

    -전문(p.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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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에서, 2024. 4. 26. <달아실> 펴냄

  * 박숙경/ 1962년 경북 군위 출생, 2015년『동리목월』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날아라 캥거루』『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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