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사온
동길산
사흘은 춥고 나흘은 따뜻한
삼한사온
삼한의 끝날이 며칠째 이어지고
오늘 또 이어진다
외투의 단추를 있는 대로 채우고
미끄러질지도 모를 영하의 바깥 나선다
삼한사온이란 말이 처음 나오던 그 옛날에도
별반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추운 날이 길기도 했으련만
안 좋은 날보다 좋은 날을 하루 더 늘린
사람의 삼한사온
추운 날이 아무리 길더라도
삼한의 끝날은 기어이 오고
추운 날보다 하루는 더 긴
한겨울 삼한사온
-전문-
시인의 산문> 한 문장: 집 안팎이 훤한 건 달빛 덕분이다. 오늘은 보름 무렵. 정확하게 헤아리진 않았지만 며칠 전이 음력 열흘이었으니 보름이거나 하루 앞뒤다. 보름이나 하루 앞뒤는 달이 가장 둥글어지려고 하거나 가장 둥글거나 가장 둥글다가 기울어지는 때다. 달빛은 이 무렵 가장 밝다.
나를 깨운 것도 사실은 저 달빛이다. 한밤중 누군가가 나를 흔들었다.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든 달빛이 머리맡 물잔을 달그락달그락 흔들어 대었고 깊게 잠든 나를 밀고 당기며 흔들어 대었다. 얼핏 눈 뜨니 바깥이 훤했다. 날이 밝은 줄 알았다. 자명종은 두 시를 가리켰다. 오후 두 신가 했다.
오후 두 시 같은 새벽.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길어지려나. 겁부터 난다. 산골은 다 좋은데 하루가 지나치게 길다. 매화나무에 달린 매실을 헤아리고 헤아려도 여전히 그날이 그날이고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헤아리고 헤아려도 여전히 그날이 그날이다.
산골의 하루는 지나치게 길다. 더디고 심심하다. 무엇을 헤아리는 건 더디고 심심한 하루를 보내면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다. 씨가 날아와 마당에 제멋대로 핀 민들레를 헤아리고 살아오면서 겪은 슬픈 날과 기쁜 날을 헤아린다.
끝까지 간 적은 없다. 헤아리다간 관두고 헤아리다간 관둔다. 다 헤아린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헤아리다가 깜빡 놓치고 헤아리다가 깜빡 놓친다. 헤아리기엔 민들레가 너무 많다. 헤아리기엔 슬픈 날에서, 기쁜 날에서 너무 많이 지나왔다.
슬픈 날, 그리고 기쁜 날. 그런 날에서 아주 많이 지나온 지금,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사람의 한평생은 슬픈 날만 있는 게 아니고 기쁜 날만 있는 것도 아니다.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아주 많은 날이 지나가면 슬픈 날도 기쁜 날도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p. 시 71/ 론 108-109)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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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거기』에서/ 2024. 4. 5. <포엠포엠> 펴냄
* 동길산/ 1960년 부산에서 나서 부산에서 자랐다. 1989년 무크지『지평』으로 등단했으며 1992년 경남 고성 대기면 산골로 들어갔다. 지금은 산골과 도시를 오가며 지낸다. 산골 사는 30연 동안 시집『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등과 시·산문집『우두커니』등을 내었다. 『거기』는 등단 35년 일곱 번째 시집이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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