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혼자일수록 술 담배 끊고
이마를 차게 하자고
지난겨울 구들장을 지었다
때론 일주일 넘게 누구와 말을 한 기억이 없어
말의 씨가 말랐는가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따옥따옥 따오기를 부르다 보면,
올겨울도 별일 없냐고
옻닭 국물처럼 구수한 목소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고장 난 기억회로 같았다
두어 차례 송이눈을 받아먹으며
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2023년 1월 9일, 같은 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파면당한 동료들은 어찌 지낼까
학교 주소를 삐뚤빼뚤 적으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며
말의 씨가 말랐을까
잠을 청하는 게 두려웠을까
고장 난 기억회로를 못 벗고
춘분을 맞고 말았는데
복직 소식은 없어도
제비꽃은 보자고 시냇가에 나오니
연둣빛으로 빛나는 버들가지
긴 겨울잠을 털어 버린 듯
는실난실 봄바람 타는 버들가지들에 다가서니
속도 없이 내 마음이 그만
야들야들해진다
-전문(p.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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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식빵을 소주에 찍어
촉촉한 맛을 즐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들이 사르르
땅의 숨소리를 펴 보는 밤
소주가 오늘도 달다
나 죽으면 '祝 사망'이라고
봉투 써 오겠다던 친구
녀석이 비운 작업실에서
불을 끈 일밖에 없는데
소주 적셔진 식빵엔 약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다
살아갈수록 가슴에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는
뜻으로 읽히므로, 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벽에 손톱금 내고 있을 가시네의 밤도
더욱 서럽지 않다
내 죽음을 물음 뜨러 갔는지
친구는 영 소식이 없고
하룻밤 묵어 가자고 촉촉하게
반짝이는 별
사르르 바람결 타는 벚꽃 향기에
심장이 찔리고 싶은 별을
소주에 섞는다.
-전문(p.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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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에서/ 2024. 4. 5. <걷는사람> 펴냄
* 이병초/ 1998년 『시안』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밤비』『살구꽃 피고』『까치독사』 등, 시 비평집『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역사소설『노량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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