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검지 정숙자 2024. 4. 26. 02:03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바람도 없는데 집안은 한기로 출렁거렸습니다. 막힌 줄도 몰랐던 파이프에서 새어 나온 절규, 죽음을 이기려는 마지막 숨소리, 다시는 당신의 더운 이마를 짚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편찮으세요"

 

  말로 통할 수 없는 고통이라니!

  허망이란 최후에 남아 있는 침묵

  당신이 벼르고 벼르다가 때를 골라서

  광풍을 한바탕 휘몰고 가신 후에야

  붉은 피를 닦아내며 깨우쳤습니다

 

  뿌리째 뽑혀서 흔들리지 않을 때야, 당신이 뒤척이던 처절한 손짓이, 참으려고 악물었던 마디마디 숨소리가, 마지막을 알리는 웅변이었다는 것을

    -전문(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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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가 보이는 풀밭교실

 

 

  그해 여름 우리 교실은 바다가 보이는 풀밭이었다

  바다 건너 제련소의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고

  진종일 파도 소리 음악 같던 군산 공원

  따라 부르기만 했던 음악 시간이면

  선생님은 소리소리 질러서 선창하였다

 

  '여름 저녁 불던 바람 잠 바람 꿈 바람, 호박꽃이 소록소록 잠이 들었네'

 

  작년 여름,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를 만났을 때 추억을 함께 부르다가 조용히 부르다가 점점 크게 부르다가, 오랜만에 웃고 싶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6.25 난리도 지나간 다음

  그해 여름 우리 교실은 풀밭이었다

  풀밭에서 배울 것은 참으로 많아서

  꽃 이름을 외우다가 잠자리를 잡다가

  오락 시간이면 구경꾼들에 싸여서

  "꽃과 같이 아름다운 나의 사랑 에레나씨"

  멋지고 구성지게 유행가를 부르던 남자아이,

  앵콜, 앵콜, 덩달아 넋을 놓고 있다가

  우리는 도시락을 번갈아 가며 잃어버렸다

  너도나도 오로지 밥이 그리웠던 시절,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이 가져갔으니 괜찮다" 했지만

  보리밥에 무짠지

  그 밖에 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선생님은 날마다 그림을 그리라 하고

  크레용도 도화지도 없이 연필로만 그리는 그림

  풀밭에서 바라보던 우리들의 멀고 먼 내일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우면 돛단배를 그린다

  돛단배를 타면 세계로 갈 수 있겠지

  순풍 타고 떠나면 도착할 수 있는 나라와 나라

  선생님은 날마다 장래 희망을 말하라 하고

  이순신 장군도 되고, 유관순 열사도 되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퀴리 부인이 될 수 있었던

  풀밭에서 그리던 요요한 미래

  창창하고도 거룩했던 우리들의 꿈

 

  여름 저녁 불던 바람 잠 바람 꿈 바람 호박꽃이 소록소록 잠이 들었네

     -전문(p. 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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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에서/ 2024. 4. 1. <시와시학> 펴냄 

 * 이향아/ 1963-1966년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 시집『눈을 뜨는 연습』『갈꽃과 달빛과』『오래된 슬픔 하나』『살아있는 날들의 이별』『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온유에게』『안개 속에서』『별들은 강으로 갔다』캔버스에 세우는 나라』『순례자의 편지』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등 26권, 수필집『쓸쓸함을 위하여』『불씨』『새들이 숲으로 돌아오는 시간』『오늘이 꿈꾸던 그날인가』 등 18권, 문학이론서 및 평론집『시의 이론과 실제』『창작의 아름다움』『현대시와 삶의 인식』『삶의 깊이와 표현의 깊이』등8권, 호남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