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이향아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날마다 양재천변 둑길을 걸었던 것은
모감주나무를 만나고 싶어서였네
비탈에서 가지 뻗어 금빛 꽃을 피워 올리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연두색 주머니에
먹구슬 같은 염주알이 나날이 익어가면
내 가슴도 터질 듯이 차 올랐었네
"무슨 나무지요?"
걷다가 멈춰 나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지나던 사람들이 내 곁에 모여들고
나는 기쁜 듯이 대답했어
"모감주나무예요"
내가 심어 기른 듯이 뽐내면서
내 나무라도 되는 듯이 자랑스럽게
그와 아주 친한 듯이 다가서면서
재작년 폭우로 무너진 둑은 검은 뻘밭이었어
관청에서 수해 보상금을 청구하라고 할 때
눈만 뜨면 이런저런 탓들만 칡넝쿨처럼 뒤엉키고
모감주나무는 비에 휩쓸렸는지 흔적도 없고
어디에 묻혔는지 떠내려갔는지
찾을 길도 몰라서 답답했네
부서진 건 고치고 휩쓸린 건 쓸어모았지만
모감주나무는 돌아오지 않았네
나는 다 잊어버리고, 파묻어 버리고
날마다 둑길을 걷는 일도 작파해 버리고
몇 달이 반년 되고 해가 몇 번 바뀌도록
금년 여름 꿈인가 다시 만날 때까지
생시인가 눈을 껌벅이며 들여다보기까지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움츠리고 있었네
뿌리만 죽지 않으면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그러나 나는 전처럼 다가갈 수가 없네
모감주나무를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했는가 한 일이 있기나 한가, 뿌리만 성하면 산다는 걸 누군들 모르나
알면 무엇 하나
그래도 그를 보려고 둑길을 다시 걷네
옛날 같지 않네
나 겨우겨우 걷고 있네
-전문-
에필로그> 한 문장: 모감주나무는 산책길에 서 있었다. 아침 산책 시간 나는 모감주나무 곁에서 쉬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해 큰비에 양재천 둑이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모감주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악과 안타까움뿐, 어떻게 그를 찾아낼 수 있었으랴. 그해의 수해는 유별하여 구청에서는 수해 보상금을 주기도 하였지만, 연고자가 확실하지 않은 모감주나무는 다만 한 그루 나무로 없어져 버리고, 누가 그의 부재를 애도하였을까.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못하면서 쓸쓸함과 아쉬움으로 둑길을 걷는 일도 그만두었다.
지난봄 우연히 그 길을 지나다가, 옛날에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어린 움을 밀어내고 있는 모감주나무를 다시 만났다. 그때의 내 마음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반가운 마음보다도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으로 참회와 같은 정한을 쏟아놓았더니 겨우 한 편의 산문에 가까운 글(시라고 할 염치가 없어서)이 되었다. 오늘 새 시집을 내면서,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 마음을 터놓으니,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 (p. 시 30-32/ 론 123-124)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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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에서/ 2024. 4. 1. <시와시학> 펴냄
* 이향아/ 1963-1966년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 시집『눈을 뜨는 연습』『갈꽃과 달빛과』『오래된 슬픔 하나』『살아있는 날들의 이별』『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온유에게』『안개 속에서』『별들은 강으로 갔다』『캔버스에 세우는 나라』『순례자의 편지』『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등 26권, 수필집『쓸쓸함을 위하여』『불씨』『새들이 숲으로 돌아오는 시간』『오늘이 꿈꾸던 그날인가』 등 18권, 문학이론서 및 평론집『시의 이론과 실제』『창작의 아름다움』『현대시와 삶의 인식』『삶의 깊이와 표현의 깊이』등8권,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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