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검지 정숙자 2024. 4. 20. 01:55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모든 저녁은 목초지에서 돌아온다

  빈방 가득 빛이 없는 연료들

  이불 속에 가득 찬 실뭉치에

  따듯한 말이 들어 있긴 할까

 

  양 떼는 웅성거리는 밤에 자라서

  등과 불룩한 배는 누구의 몸 치수를 재는지

 

  길게 풀어져 나온 실뭉치들로

  엉킨 저녁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서로의 얼굴에서 터진 솔기 같은 표정이 적힌다

 

  바깥과 안쪽 모서리에 상처가 난다

  저녁을 다 감기 전에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고

  풀밭에 떠도는 말을 양 떼가 몰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

  양 떼의 울음으로 실은 풀어지고 초식동물의 잠은 감긴다

 

  입구를 흔들면 저녁이 짧아진 양 떼들이

  우르르 몰려 나갈 출구를 찾는다

 

  양의 털실로 밤의 모서리를 접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실을 키우는 몸통"이라는 구절로 미뤄, 시인에게 양은 즉각적으로 동물성과 식물성이 교차하는 이중 지대다. 만물이 소통하고 교차하던 먼 옛날의 신화시대처럼, 그로테스크하게도 양은 '실'을 키우는 나무이면서 그 실을 '털'로 치환하는 동물이다. 도대체가 실을 잣는 양이라니! 하지만 시인의 직관은 대범하게도 좀 더 멀리 간다. 곧 '실'의 생산을 넘어서서, '실'에 내재하는 매개적 속성으로의 전환이다. 한 번 풀리면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라는 문장에서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데, 이때 다시금 '실'은 '털'과 교차하면서 중력을 무력화할 정도의 악력握力을 가진 무엇으로 변형된다. 

  그는 양떼를 가만히 지켜본다. 가끔 양들은 울음을 뱉어내며 온몸을 휘감는 실의 은근한 간지럼을 표현하고, 서로에게 밀착하여 비벼댐으로써 이 간지럼을 해소한다. 실이 잠시 힘을 잃는 때는, 양들이 잠드는 순간이다. 신경을 멈췄는지 실타래는 축 늘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근육질의 초식동물은 여전히 실을 놓지 않는다. 양들은 몽유하듯 실을 감으며 "밤의 모서리"를 접는데, 이와 동일한 구조로 양들이 뽑아내는 실은 '현실의  모서리'를 접는다. 여기서 모서리를 접는다는 표현이 무척 매혹적이다. (p. 시 118-119/ 론 134-135) <박성현/ 시인 ·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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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야간개장 동물원』에서/ 2024. 4. 15. <달을 쏘다> 펴냄 

 * 박민서/ 2019년 『시산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