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그리하여 서정은 이 시대의 우회로이다/ 박동억

검지 정숙자 2024. 4. 7. 16:34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에서

 

 

  * 말은 곧 인간의 법정이다. (p. 11)

 

  * 휴머니즘의 회복을 주장하는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라도 "휴머니즘의 파괴는 결코 진보가 아니라는 것이다."1) 무엇보다 그는 인공지능 개발은 효율적인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한 기업들의 자본에 기대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공지능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대어 모든 것을 자본화하는 데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과정에서 야기될 것은 인간의 도구화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인공지능의 미래 또한 자명하다. 누구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시 쓰는 '노동'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시 쓰기는 인간 존재의 고차적인 능력을 증명하지 않게 될 것이고, 시 작품은 대량 생산된 상품의 일부가 될 것이다. (p. 120)

  1)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인공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 박종대 역, 열린책들, 2022. 58쪽.

 

  *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물을 때, 루소 자연이라고 답하고, 프로이트 타자라고 답한다. (p. 154)

 

  * 독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독백의 언어, 타인의 귀를 자위도구쯤으로 여기는 언어, 언어의 히키코모리화에 이를 때 시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대화를 지속하려고 하는 한 우리에게는 일말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시는 타자에 관한 혐오를 표현하면서도, 실상 강하게 타자의식을 의식하면서 창작되고 있고, 따라서 다정과 싸늘함이 뒤섞인 채로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성찰하고 있다. (p. 168)

 

  * 인터넷은 인식에 가속도를 더한다. (p. 194)

 

  * 현대인은 물리적 공간이라는 '느린 장소'와 네트워크라는 '빠른 장소'에 걸쳐진 채 살아간다. 인터넷 상에서는 교감과 의견의 교환 역시 지나치게 빠르다. SNS 시스템은 지나치게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SNS의 편리함으로 인해, 현대인은 침묵하고 타인에 대한 숙고의 시간을 예비하기 어렵다. 익명의 아이디를 가면으로 쓰고 발설하는 민낯의 목소리는 노골적이기 때문에 혐오스럽다. 현대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일을 피하려고, 타인과 매 순간 진심을 교환하는 인터넷 사이트들과 관계한다. 현세대는 진심의 추악을 여실히 실감한다. 이 시대의 정치는 타자의 혐오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되고, 혐오 속의 타자성을 피부로 사유함으로써 진정한 의의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서정은 이 시대의 우회로이다. 서정은 인식의 가속도와 타인의 가까움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일이다. 서정은 산책이다. 문자라는 더디고 수고로운 작업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뒤처지는 것을 택하고, 뒤처지는 것으로써 마음의 속도를 조절한다. 문자의 깊이만큼,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고 숙고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지고 타인을 바라본다. (p. 195)

 

  * 극한 사랑은 성스러움에 이른다. (p. 200)

 

  * 나르키소스와 강물은 마주 보고 있는 연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나르키소스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강물은 나르키소스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이때 인식되지 않는 것은 타자의 얼굴이다. 본래 얼굴은 타자를 향해 있다. 누구나 두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 불가능하듯 얼굴은 항상 타자에게 먼저 발견된다. 또한 얼굴은 응답을 요구한다. 타인의 미소에 미소로 응답하거나, 타인의 침묵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얼굴을 자기 소유로만 간주할 때, 얼굴은 그저 각자의 전재에 대한 독백이 된다. (p. 238)

 

  * 타자의 마음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어둠이다. (p. 250)

 

  * 항상 우리 곁을 지키던 가족의 얼굴, 자신의 표정을 감추던 친구의 얼굴에도 그로테스크는 깃든다. 모든 인간의 진실은 섬뜩하다. '나'가 납득할 수 없는 욕망이 표정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끔찍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람의 얼굴이며,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끝에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타자의 섬뜩한 표정까지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p. 256)

 

  * 문학에는 1인칭이란 없다. (p. 257)

 

  *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목표는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무의식 속에 감춰버린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무의식의 잔재로 남는 대신 다시금 의식의 방어벽을 뚫고 떠올라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이때 의식은 '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침입하는 '수동적' 경험을 스스로 그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능동적 놀이로 전환한다. 인간이 수치스럽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해서 상기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p.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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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에서/ 2024. 2. 8. <푸른사상사> 펴냄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주요 평론「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 200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정확한 리얼리즘 :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저서『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공저『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