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 20인의 '한 문장'들

검지 정숙자 2024. 3. 14. 14:09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

         20인의 '한 문장'들 

 

     오탁번 외 19인

 

              

   '비백飛白'은 후한後漢 시대의 서예가 채옹蔡邕이 흰 벽을 귀얄로 칠하는 것을 보고 창시한 서체라고 한다. 비로 쓴 것처럼 잘게 갈라져 획이 비동飛動하면서 흰 귀얄자국이 나타나는 서체다. 붓의 끝마무리가 깃발처럼 휘날려서 편액 같은 대자大字에 잘 어울리는 서체로서 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갈필渴筆과는 다른, 서예의 고도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p. 39-40) (오탁번)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옛날에 그는, 그의 시는 무엇인가, 어떤 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그의 시는 빈 곳 투성이다. 이 새 시집 『시집보내다』가 그렇다. 그러나 이 빈 곳들은 그냥 비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무엇인가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부정의 여백에 새로운 어떤 탄생을 예비해두고 있으리라. 구멍이 성성 뚫린 이 여백이 미덥다. (p. 87) (방민호)

 

  우리들은 시를 읽을 때 너무 의미 중심으로 단번에 읽는 경향이 있다. 음절 하나의 미감과 촉감까지 음미하며 느릿느릿 읽는 그런 이 읽기가 필요하다. 오탁번 시인은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고유어를 발굴하여 시어로 활용하는데 그의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사전을 검색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p. 88) (이숭원)

 

  다시 강조하지만, 토착어(vernacular)는 중앙 집권적 공식 언어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현재형으로 쓰이고 있는 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역어라는 의미 외에도 살아 있는 언어의 원형을 뜻하기도 한다. 표준어어와 토착어의 공존을 통해 우리는 언어군의 다양한 수평적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p. 128) (유성호)

 

  오탁번의 시세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형성되고 있다. 첫째; 언어미학적 관점, 둘째; 서사 구성적 측면, 셋째; 원형적 상상력의 관점이라는 세 가지 측면의 종합적이고도 복합적인 관계망 위에서 직조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 동인으로 시적 출발을 한 오탁번은 언어에 대한 세련된 감수성을 바탕으로, 문명화된 현실 이면으로 사라진 순수하고 근원적인 세계에 상상력의 촉수를 드리운다. (p. 134) (송기한)

 

  시란 가장 절제된 문학 양식이기에, 외부의 현실을 묘사하는 시인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의 어느 한 점을 선택하고, 그 점에 집중하기라는 이 과정을 오탁번처럼 정밀하게 행하는 시인은 많지 않다. (p. 154) (박슬기)

 

  궁핍하고 남루한 풍경을 남루하지 않게 건너고 있는 오탁번 시의 활보는 지금 · 여기, 그리고 저기에 있는 우리들의 숙명을 견지하며 초월하도록 유인하는 원색의 마차다. 오탁번의 시는 일상의 근거리와 시원의 원근거리를 오가면서 남루한 삶을 해학적으로 일탈하여 초월에 이르게 하는 마력의 울림인 것이다. (p. 170) (진순애)

 

  한평생 썼던 소설을 모아서 6권의 전집을 냈는데 고구려의 장엄한 역사를 다룬 장편 「미천왕」과 탈북자 문제를 다룬 「1억 년 전의 새 발자국」, 미묘한 한일관계를 다룬 「포유도」 같은 소설을 보면 오탁번의 유다른 면을 보게 된다. 정치인들에게 '좆 깔 놈들'이라고 욕하는 시는 유머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면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생을 좀 했을 것이다. (p. 191) (이승하)

 

  화려하게 장정裝幀된 이 책 『아침의 예언』은 선생의 시와 문학에 대한 매서운 염결의 정신을 베낀다. 후기後記 "시인이라는 신분을 엄숙한 소명처럼 받아들인다."는 선생의 진술은 그만두고라도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을 1973년, 자비를 들여 꽤 호사스럽게 출간한 이 책을, 비록 1,000원이라는 정가를 매겼을지언정 한 권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고스란히 소장하면서 지인에게만 나눠주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입증한다. (p. 196) (오태환)

 

  전통 미학에서 '해학'은 유희적이되 지적이다. '해학'은 해맑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나올 수 있는 문학적 자질이다. 슬픔과 분노도 웃음으로 되받아치는 해학은 예리한 지적 행위이면서, 한없이 너그러운 삶의 태도이며, 성숙한 문학적 시선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적 유산인 '해학'이 그의 시에서 현대적으로 거듭나고 있다. (p. 220) (고형진)

 

  기원전 로마 시대의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란 저서에서 노년의 문제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덕과 학문을 권장하고 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미덕이 무엇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오탁번 시인의 작품에서 확산되고 있는 그 해학이 그의 노년기 작품과 인생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p. 240) (이동재)

 

  시는 특별한 말을 늘어놓는 글이 아니라 말을 특별하게 쓰는 글이 아닌가. 맞다. 선생의 작품들에서 이들은 시적 발상법과 언어 운용의 원리를 엄수하여 심미적으로 조율되고 기술적으로 배치된다. 선생의 뛰어난 시편들에서 이 낱말들은 그 자체로 자안字眼이 되는, 시를 시로 성립시키는 구조적 직능을 부여받는다. (p. 258) (이영광)

 

  흔히 한국시의 특징 중의 하나로 한의 미학을 든다. 신산스러운 우리 역사를 견디어온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한의 미학도 미학이지만, 이 시집(『시집보내다』)을 읽은 후에는 한국시의 중요한 힘의 하나로 해학의 미학을 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해학의 미학은 단지 즐거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풍자로도 드러난다. (p. 268) (한용국)

 

 

  L. 멈포드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가의 고유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예술은 삶의 창조적 순간을 재현함으로써 그 자신에게나 참여자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고, 그것은 타인에게 창조성이라는 반응을 고취시킨다. 예술가의 창조적인 표현은 그 자신과 타인의 의식을 여러 가지 감각과 표정으로 풍부하게 만들고, 창조성을 결여한 채 공허하게 반복되는 삶에 대항하는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p. 276) (장은영)

 

  "맨살을 만지는 것 같은" 생생한 감각은 바로 이런 아이의 새로운 체험과 그것의 진솔한 발화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발화법이 바로 그러하다. 싱싱한 생명력과 웃음으로 가득 한 시편이, 예의 그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발화를 통해 계속 쏟아질 것이고 그것은 생각만 해도 '눈 맞는 아이처럼' 신나는 일이다. (p. 288) (호병탁)

 

  오탁번의 시는 '동심童心의 시'이며, '취의 시'에 해당한다.

 일찍이 '동심童心'과 '취'는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이탁오와 원굉도가 주장한 바가 있다. 그들의 사상은 실학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특히 연암 박지원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 이탁오는 감정을 속이지 않는 진솔함이 있어야 문장이 하늘과 통하고 광채를 띤다고 했다. (p. 289) (장인수)

 

  세월과 살이가 만들어낸 주름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원한 동심의 아이가 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어른이면서도 아이다. 어른의 동심은 애어른의 아이와도 또 다르다. 세상을 살다 보면진화보다 지속이, 변화보다 고수가 한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어른 속의 아이는 퇴화가 아니라 간직이다. 살다 보면 이게 참 어렵다. 이렇게 시 쓰기는 더 어렵다. (p. 296) (최준)

 

  '첫사랑'이라는 말은 연분홍 같다가도 금세 슬퍼지는 단어이다. 별거 아닌 소소한 이야기지만 돌이켜보면 그 순간만큼 알싸한 것도 없는 것이 첫사랑이란 꽃자리로 남겨진 빈터이다. 이렇게 '첫사랑'이라는 말에 매료되는 것은 이 말 자체가 실패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타지는 영원히 힘이 세어 노인들의 눈에서 분홍 꽃을 발견하게 한다. (p. 306) (윤향기)

 

  종심의 세계는 '두루미가 뉘엿뉘엿 날아가는' 정도의 비가속의 세계, 견지의 세계이다. 또한 종심의 본질은 마음이 맨 나중에 이르러서야 닿을 수 있는 겸손의 자리인가 하면 마음의 첫자리인 천진의 자리에 닿아 있을 것이다. 겸손과 천진, 자유자재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견지의 시선이 어우러져 빚은 시집, 오탁번 시인의『시집보내다』를 넘기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p. 311) (조정인)

 

  오탁번은 순우리말을 시어로 즐겨 쓰는 이 땅의 많지 않은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임꺽정』을 쓴 홍명희, 『토지』를 쓴 박경리, 『객주』를 쓴 김주영, 『혼불』을 쓴 최명희, 『관촌수필』을 쓴 이문구, 『장길산』을 쓴 황석영 등은 우리 문학사에 민중어의 보물창고를 선사한 소중한 작가이다. 시인들 중에 누가 있는가? 제주도 사투리를 시어로 끌고 온 문충성 정도? (···) 그런 점에서 오탁번의 작업은 주목되어어야 한다. (p. 333) (이승하)

 

  기계문명의 잔광에조차 간섭받음 없이 문명에 토막 난 시간까지를 넉넉히 품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안다. 한국시가 4차 산업의 강박에 시달릴지라도 오탁번의 시는 언어의 질감과 온도에 순응하는 우리말을 채집 발굴하여 시를 써냄과 동시에 뼈저리게 반성을 요구하는 역사의 질곡도 예리하게 파고들 것임을. (p. 347) (이병초)

 

  # 지용이 문학 외적인 이유로 한국 문학사의 미아로 잊혀져 있을 때, 선생은 본격적 연구를 통해 그를 문학사의 양달로 인도한다. 선생의 석사논문 「지용시 연구」는 1976년 간행된 논문집 『현대문학산고』(고려대 출판부)에 실려 있다. 이는 정치와 이념이 문학을 재단하고 압박하는 부조리한 시대에, 지용을 학술논몬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례다. 박사논문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는 지용을 한국시사의 주요 변수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의미를 추적한다. 지용과의 만남은 선생의 문학을 정의하는 데 논리적 전제로 기능한다. 선생의 술회(「비백飛白에 대하여」)에도 당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미당 이외에 지용을 꼽은 바 있다. (p. 351) (오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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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에서/ 2024. 1. 25. <태학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