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늦은 눈 외 1편/ 이광소

검지 정숙자 2024. 4. 7. 02:08

 

    늦은 눈 외 1편

         다산초당에서

 

    이광소 

 

 

  쫓긴 듯 내려온 곳 강진 도암 땅에

  한 자 두 자 눈이 내리네

 

  어제도 기다리고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

  알았다는 듯 한 줄 두 줄 눈이 내리네

  늦어서 급히 서둘렀다는 듯

  지붕에도 나뭇가지에도

  다섯 줄 여섯 줄 내리네

  반가워서 뜰에 나가 손을 흔드니

  그래, 알았다는 듯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내리네

 

  기쁜 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새로운 소식 기다렸던 다산도

  이렇게 들뜬 마음이었을까

  살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눈물이 앞을 가려 뒤뜰 연지못으로 돌아가 보니

  밤새 몰래 내린 두꺼운 얼음책이 있네

 

  녹지 않은 소식은 얼마나 달콤한지

  비바림 속을 견뎌온 정든 나무들은

  다산 유배되어 있을 때 경소리 들은 듯

  야윈 가지 초당을 향해 굽어 있네

 

  시린 겨울밤 내내 목민심서를 쓰던

  다산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내 등이 굽어지네

  오늘은 무슨 소식이 있을지

  이른 새벽 일어나 다조에 차 끓이는 소리 들리는데

  내 마음을 달랠 수 없네

 

  수백 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한 자 두 자 눈이 내리네

 

  기다리는 마음 안다는 듯

  한 줄 두 줄 눈이 내리네

     -전문(p.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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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버린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내가 버린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검은 봉지 속에서

  마을 하수구에서 플라스틱병 속에서

  깊은 저수지에서 트렁크 속에서

  버린 것들이 울고 있다

 

  나에게 버림받은 것들에게서

  번식하는 수많은 애벌레들

  꿈틀꿈틀 자라는 버러지들

 

  나를 떠난 것들이 거리 곳곳에 쌓여 있어도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바람 부는 날

  골목에서 히끗히끗 썩은 냄새 떠돌고

  비 내리는 날

  마당에 무성한 울음소리 차오르고

 

  방심하는 사이 내 무릎까지 차오르더니

  도처에 떠도는 흰뼈들의 비명소리와 뒤섞여

  내 가슴까지 차오르더니

  무쇠빛 날카로운 소리

  내 목까지 차올라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네

 

  내가 지나온 길

  손수건처럼 흔들던 나비 날개는

  핏빛으로 물들면서

  산등성이 너머로 사그러지고

 

  반성한 시간도 없이 어둠이 내리면

  입을 틀어막는 복병

  숨 막히게 한 그것

 

  내가 버린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전문(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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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에서/ 2024. 3. 30. <詩人廣場> 펴냄 

  이광소(이구한: 평론가)/  1942년 전북 전주 출생,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 부문 당선 & 2017년『미당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약속의 땅, 서울』『모래시계』『개와 늑대의 시간』, 평론집『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