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자유의 자유
강나루
민주주의와 자유는 동의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혼용하고 혼동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범위 내
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최대
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소의 제약인 셈이다.
중학생 때 보았던 수많은 소설 중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일본 SF소설에서는 최악의 민주주의와 최선의 제국주의 중 어느 쪽이 국민에게 이로운가라는 주제를 배경으로 삼았다. 이 소설에서 최악의 민주주의는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수백만의 자국민은 전사시킨 제국에게 스스로 국가를 헌납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이 소설을 읽은 누구라도 제국주의의 정점인 황제 라인하르트가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웬리 장군에게 "민주주의는 인민들의 자유의지로 자신들의 제도와 정신을 타락시키는 체제인가?"라고 비꼬는 장면을 인상 깊게 기억할 것이다.
또한 국가의 원수인 위원장의 애국을 호소하고 전쟁에 앞장설 것을 주장하는 연설에 모두들 기립할 때 양 웬리가 기립하지 않는 장면도 떠오를 것이다. 왜 기립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나라는 자유의 나라이며 기립하고 싶지 않을 때 기립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나는 그 자유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고 답하고, 또다시 왜 기립하고 싶지 않은지를 물으니 '대답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하겠다'고 답하는 모습에서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동의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혼용하고 혼동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범위 내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최대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소의 제약인 셈이다. 그렇다면 80년대 민주투사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이 자유를 제약하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피흘려 싸웠느냐 할 것이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서로 교집합이 있으면서도 또한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화주의는 '자연상태'에서는 약자가 강자의 자의에 예속되는 '자의적 지배'가 존재하므로 법적으로 자유를 보장해먀만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이 다른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공화주의의 자유는 기본권의 보장과 더불어 법의 제한을 받지만, 자유주의의 자유는 기본권의 보장 하에서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독재 시절에는 공화주의적 시점의 자유만으로도 대단한 진보이자 성취였기 때문에 충분히 목표로 할법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쟁취해냈고,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소한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만큼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 MZ세대라고 함부로 묶어 칭하는 세대에게 86세대가 온갖 욕을 다 얻어맞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업적은 대단하다. 그 덕분에 나는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롭게 자랐고, 더욱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막스 베버를 읽었다고 보안사에 잡혀가는 웃기지도 않는 블랙코메디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 전 어느 정치인이 국기에 댜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지 않아서 정치적으로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난 당시 그 상황이 너무나 의아했다. 그 정치인이 무슨 짓을 했든 범법자가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면 개인의 행동에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에서 국민의례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니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정치적 후폭풍을 스스로 책임지면 될 일이었다.
나 또한 TV나 뉴스를 보다가 꼴도 보기 싫은 정치인이 나오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딱히 범법자가 아니라면 초법적 방법으로 정치에서 축출당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는 사적 처벌을 금지하고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감정으로 정당한 지위에서 축출해낸다면 조선시대에 여러 번 있었던 사화보다도 후퇴한 것이 되고 만다. 최소한 사화는 유교국가에서 유교적 명분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므로 자유를 훼손하는 그 모든 시도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어린 시절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했던 것에 비해 크게 공화주의적 문구로 수정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다. 자유롭고 정의롭지 못하다면 충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경고이자 대한민국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또 한 번의 경고인 것이다. 우리가 국가의 구성원으로 소속되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조건을 충족하지 않을 시 촛불을 들고 국가의 권위를 거부할 것입을 천명한 것이며 우리는 실제로 수년 전 행동으로 옮긴 바가 있다. 정부를 거부할 자유를 누릴 정도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적 이유', '신체적 이유'로 자유를 자유의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발견한다. 우리가 국가의 소속으로서 요구하는 수많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해낼 수 있는 기능은 아니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기능이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나라식의 '시대혁명'이 있어여 할 부분이다. ▩ (p. 139-143)
* 블로그 註) MZ 세대: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86세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 90년대에는 이들이 30대였으므로 386세대라 했고, 지금은 그들이 50대가 되었으므로 586세대라고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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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집 『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에서/ 2022. 8. 30. <시와사람> 펴냄
* 강나루/ 1989년 서울 출생, 2020년『아동문학세상』으로 동시 부문 & 2020년『에세이스트』로 수필 부문 & 2020년 『시와사람』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감자가 눈을 뜰 때』, 동시집『백화점에 여우가 나타났어요』, 연구서『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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