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나를 살렸다
이광복/ 소설가
나는 1951년 음력 4월 30일(양력 6월 4일) 충남 부여 석성면 증산리 원증산마을 766번지에서 출생, 종가의 대를 잇기 위해 세 살 때 큰아버지 큰어머니 슬하에 양자로 들어갔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시루봉 언덕바지 감나무 옆 윤팔병 씨네 땅에 번지도 없는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좌향은 북향이었다. 내가 태어난 직후 생가 부모님은 766번지를 떠나 근처 이영우 씨네 집 사랑채로 옮겨 곁방살이를 했고, 먼저 살던 초가집은 헐리고 집터는 남새밭이 되었다. 몇 년 뒤 생가 부모님은 동네 공동우물에서 가까운 강두현 씨네 집 뒤 764번지 윤도병 씨네 초가집을 사서 이사했다. 방위는 남향이었다.
양가와 생가는 빤히 건너다보였다. 편의상 지대가 높은 양가를 윗집, 상대적으로 낮은 764번지 생가를 아랫집이라 불렀다. 윗집에는 큰아버지 내외분과 작은누님과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고, 아랫집에는 부모님과 큰누님과 어린 동생들 넷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살았다. 두 집은 모두 가난했다. 윗집에는 땅 한 뼘이 없었고, 아랫집은 겨우 논 엿 마지기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옛 집터 남새밭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달리 말해서 윗집은 극빈 중의 극빈, 아랫집은 빈농 중의 빈농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을 전부 깨우치고 천자문을 떼었다. 동네 어른들은 나에게 '천재'니 '신동'이니 '문장'이니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거의 매일 밤 우리집으로 놀러 오신 '마실꾼'들에게 『춘향전』『심청전』『흥부전』『홍길동전』『삼국지』『유충열전』『장국진전』 같은 소설을 읽어드렸다. 나는 이미 문학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
석양초등학교 재학 중 글짓기를 할 때마다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몇 차례 백제문화제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다. 1964년 초등학교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논산대건중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워낙 빈한한 터라 사실인즉 중학교 입학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선택이었다. 애당초 못 올라갈 나무를 억지로 올라간 형국이었다. 양가의 부모님은 구호 대상자, 요즘 말로 생활보호 대상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백로지를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소위 '창작노트'를 만들고 시와 산문 등을 습작했다. 그때부터 문학에만 촉각을 곤두세웠고, 그 반면 정규수업은 뒷전으로 미뤘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진학 희망자들은 예비고사를 준비하느라 보충수업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경우 고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가난이 원수였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연로하신 부모님 봉양이 더욱 시급하고 절박했다. 빼지도 박지도 못할 그 막다른 골목에서 마침내 학업을 접고 남의 집 자갈논에 늦모를 심거나 콩밭을 매면서 부모님 대신 날품팔이를 시작했다. 그 대신 나의 내면에는 장차 훌륭한 문학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담임이셨던 권길중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등사원지 필경을 하면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논산 대건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너무 힘들었다. 중학교 입학 이후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장 30리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1969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라벌예술대학 주최 전국고등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 1석으로 입상했다. 이로써 장학생 특전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가 바빴다.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에서 1970년 1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도합 12년 개근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해 6월 5일 논산역에서 완행열차에 올라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릴 무렵 영등포역에 내렸다. 적수공권이었다.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맨땅에 박치기하며 서울특별시민으로 행세하기까지의 그 과정이란 그야말로 눈물없이는 감상할 수 없는 한 편의 신파극이었다. 그러면서도 문학을 향한 꿈이 있었기에 그 살인적인 시련과 고난들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등 여러 이력을 쌓았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딴에는 각고의 노력으로 20대의 푸른 나이에 이룩한 값진 성과였다.
그 여세를 몰아 줄곧 문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 70대의 중늙은이에 이른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썼다. 각종 문학상도 꽤 받았다. 더욱이 지난해 12월 9일에는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와 부여지부가 고향 부여 땅에 아주 멋진 <이광복문학비>를 세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해 끌탕을 하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 분발을 다짐해 본다.
한편 필자는 1975년 한국문인협회에 『월간문학』 말단 기자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후 1992년 제19대 최연소 이사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제23대까지 내리 연임하는 동안 2005년부터는 편집국장을 겸직했다. 2007년 제24대 소설분과 회장에 당선되었고, 2011년 제25대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상임이사를 겸임했으며, 2015년 제26대 부이사장에 재선되어 역시 상임이사를 겸임했다.
2019년 임원건거에서는 역대급 압승을 거두었고, 대망의 27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4년 단임 임기를 마치는 동안 모든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제28대 집행부에서는 영예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받았다. 이렇듯 최하위 말단에서 최상위 수장에 이르는 외길 행진이야말로 문협 역사상 과거에 없었고, 단언컨대 미래에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진기록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지난 세월 문단의 한복판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고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모든 분들이 무척 고맙다. 결과적으로 문학이 나를 살렸다. 이제 나는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문학사에 길이 빛날 진짜 좋은 작품을 써야 할 것이다. ▩ (p. 6-7)
-------------------------------
* 『문학의 집 · 서울』 2023. 7월(261)호 <수요문학광장 201_2013. 6. 21.> 에서
* 이광복/ 1951년 충남 부여 출생,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현상모집 장막회곡 입선, 1974년『신동아』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현대문학』소설 추천, 1979년『월간독서』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소설집『화려한 밀실』『사육제』『겨울여행』『먼 길』『동행』『만물박사(3권)』, 장편소설『풍랑의 도시』『목신의 마을』『폭설』『열망』『술래잡기』『겨울무지개』『바람잡기』『송주임』『이혼시대(3권)』『삼국지(전8권)』『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사람과 운명』『불멸의 혼-계백』『구름잡기』『안개의 계절』『황금의 후예』, 콩트집『풍선 속의 여자』『슈퍼맨』, 산문집『절망을 희망으로』『슬픔을 기쁨으로』『불행을 행복으로』, 전래동화『에밀레종』, 교양서적『태평양을 마당처럼』『세계는 없다』『끝나지 않은 항일투쟁』『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문학과 행복』, 시나리오『시련과 영광』『아, 대한민국』등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의 자유/ 강나루 (0) | 2023.08.02 |
---|---|
국보 70호『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정용국(시조시인) (0) | 2023.07.22 |
아버지/ 정승재 (2) | 2023.07.20 |
헤밍웨이의 법칙/ 이길원 (0) | 2023.07.19 |
신상조_산문집『시 읽는 청소부』「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0) | 2023.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