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왕조의 황혼을 향기롭게 지켜낸 어머니와 아들
김선영
우리나라 고전시가들은 나에게 영감을 준다. 어린 날 어머니가 흥얼거리며 들려주시던 서정성 넘치던 시조들, 거기에 시조에 얽힌 고사들까지 밤새워 들려주실 때의 행복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반복해 들려주셨으므로 고려시대 인물인 이조년의 빼어난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애송했고, 어느 지면에서도 이를 고백한 일이 있다.
어머니는 달과 흰 배꽃가지와 자규새를 불러와 나의 상상 속에 한 공간을 마련해주시고, 이 우아한 언어들과 친구를 맺게 해주셨다. 황진이의 시조 여섯 수를 들은 것도 어머니로부터였다. 황진이의 생애를 마치 동시대 사람인 양 들려주셔서 시인을 실제로 만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황진이의 시조들을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산은 옛 산이로되」,「어져 내 일이야」,「청산리 벽계수야」,「내 언제 신이 없어」,「청산은 내 뜻이」 등 아름답고 깊고 높은 명시조와 명품 언어를 품어 안는 체험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고 후일 딸에게 시를 쓰게 한 어머니의 무심한 배려이셨다.
아울러 내 고향 개성 사람들에게는 고려의 도읍지에 사는 사람들답게, 고려 말기 충신들의 충절과 그에 얽힌 고사들과 남기고 간 시조들을 가슴 깊이 품고 사랑하였다. 포은 정몽주를 어찌 잊으랴!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하여가」로 정치적 의향을 시험하였을 때 그는 즉시 「단심가」로 응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정몽주, 「단심가」 전문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에 정면으로 대응한 올곧은 시조이다. 그런데 이 「단심가」는 그의 어머니 이씨부인이 지은 「백로가」와 함께 읽어야 한다. 아들의 충절은 어머니로부터 길러졌던 것이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씨부인, 「백로가」 전문
무너지는 한 왕조의 황혼을 고매한 두 모자가 참 향기롭게 지키고 있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남북교류가 활발히 이어지던 시절, 고향 친구와 함께 불교방송국에서 주최한 북한 사찰 순례단의 일원이 되어 거의 칠십 년 만에 개성의 변두리나마 밟아본 적이 있다. 그때 제한된 일정 속에서도 선죽교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어릴 때 보았던 돌바닥 한 지점에 정몽주 선생의 핏물 스민 돌이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붉은 빛이 그분의 피든 아니든 오묘하게 물들어 있는 충절의 은유는 여전히 커다란 감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굽이치는 한복판에서 드높은 지조와 충절을 지켜낸 어머니와 아들의 생애와 정신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그 두 모자의 올곧은 참뜻이 시조라는 문학작품에 담겨 전해지고 있음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인간 품성의 뿌리를 맑게 꼿꼿이 심어준 내 고향 개성이 사무치게 그립다. ▩ (p. 07)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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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3. 8월(262)호 <내 마음의 시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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