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아버지
정승재/ 소설가
물질고아원이 있었다.
버려진 사물을 가엽게 여겨 집 안으로 주워 온 선배님이 있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와 모아두고, 날이면 날마다 그들과, 아니 그것들과 대화를 나눈 선배님이 있었다. 성찬경 선생님(시인 1930~2013, 83세). 선생님은 사물, 그것들과 무슨 대화를 하셨을까?
1930년생이시니 나의 아버지와 춘추가 비슷하시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27년, 성찬경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 약주를 드시고 온 날이면 나를 무릎 꿇려 앉히고 무슨 좋은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아 또 저 이야기구나, 벌써 수십 번 들은 저 이야기, 저 이야기가 언제 끝날까······' 라는 기억뿐이다. 소귀에 경 읽기가 그런 말일 것이다. 사물과의 대화. 그때 나는 인간이 아니고 사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선생님도 이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다시 사물이 되셨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법에서는 사람을 둘로 구분을 하는데, 하나는 자연인이요 다른 하나는 법인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이 만든 존재라 해서 자연인이라 하고, 법인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서 법에 근거하여 만든 인간이라 하여 법인이라 한다.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사물인 것이다. 자연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연을 사물이라고 한다.
인간이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식물의 대화는 소리의 주파수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40~80kHz라고 한다. 식물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대화 소리를 인간이 듣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나무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시각으로, 아니 인간의 청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식물도 서로 이야기를 한다. 대화를 하는 것이다. 식물이 아닌 동물도 법에서는 사물이라 한다. 우리는 동물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식물과는 불가능하다.
좁은 의미에서 사물은 무생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무생물도 대화를 할지. 아내는 청소를 잘한다. 매우 깨끗하게 집 안을 정리하고 정돈한다.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을 가졌다. 물건을 버리려고 집어 들면, 물건들이 '나를 버리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이갸기를 아내에게 하면,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좀 모자란 사람인 양 쳐다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란 말인가. 이 글을 쓰면서 노트북 오른쪽 아래를 보니 오후 5시 반이라고 알려준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이제 글쓰기를 중단하고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핸드폰을 집어 드는데, 핸드폰은 오후 3시 25분이라고 알려준다. 아! 노트북이 뭔가 잘못되었구나. 노트북 시간을 클릭하니 날짜와 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사물은 시간을 건너뛸 수 있지만, 인간은 시간의 노예다. 시간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로 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물질과 대화를 하는 성찬경 선생님을 생각한다. 요즈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 아버지는 정말 돌아가셨을까? 내 방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대화를 한다. 나의 이야기를 아버지는 알아들으실까? 사진 속의 아버지는 웃고 있다. 지금 아버지는 웃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아들이 또 힘들어 하는구나. 내가 도와줄 수도 없고······' 라고 또 어제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오래전에 이미 사물이 되신 아버지가 또 보고 싶다. ▩ (p. 11)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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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3. 6월(260)호 <사물에게 말을 걸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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