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소양강에서 보낸 한 철_스피노자『에티카』/ 박미경(수필가)

검지 정숙자 2023. 4. 14. 01:47

<에세이>

 

    소양강에서 보낸 한 철

         스피노자 『에티카』

 

    박미경/ 수필가

 

 

  언감생심, 누추한 내 서가에서 집어 든 귀중본이 『에티카』라니. 아직도 나는 문학을 장식과 허세의 도구로 쓰는 것일까. 잠시 망설였다. 다시 책을 열고 그 안에 배어 있는 나의 긴장과 무지, 혼돈과 갈증, 그리고 한 줄의 기쁨을 되새겼다. 내 삶에 더없는 귀중본이 확실했다.

  2018년 늦가을에서 이듬해 겨울 초입까지 『에티카』를 만났다.

  매주 수요일 아침 춘천행 고속버스에 오를 때면 까닭 모를 설렘과 긴장,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소양강을 지나 신매대교 근처의 한 카페를 들어서면 인상 좋은 여주인이 반색을 하며 2층으로 안내했다.

  '불멸의 초록의자 방', 우리는 소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2층의 방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 벽의 색깔이 초록이기도 했고 그 방의 의자에 앉아서 대화하는 동안 우리가 꿈꾸었던 것이 불멸의 어떤 정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한 이가 스피노자였을까. 분명치 않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모였던 춘천 카페의 그 시간들은 지구가 멸망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황홀하고도 깊은 불멸의 동굴처럼 내게 남아 있다.

  춘천에 평소 존경하는 어른들이 계신다. 노피노자의 『에티카』를 함께 읽자는 권유를 받고 멋모르고 합류했다. 감히 스피노자 입문서 한 권 없이 바로 달려든 『에티카』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스피노자의 철학 읽기』, 『에티카 해설문』 등 스피노자 이해를 위한 책만 해도 산더미였다. 우리나라에서 완역 초판본 역자의 오역과 불성실로 『에티카』가 더 난해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중 황태연의 번역서가 무난하다며 추천을 받았다.

  '신에 관하여'로 시작하는 첫 챕터에서 스피노자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임을 기하학적 질서로 증명했다. 공리, 정리, 증명, 본인의 주석으로 이어지는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서술방식의 난해함이라니······. 20대에 유대교 광신자들로부터 파문과 저주를 당하고 궁핍과 절대고독 속에 집필을 해야 했던 스피노자는 자시만의 용어로 유대교의 신을 비판하며 신의 개념을 보여준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세계의 근본 원리'였다. 대자연이며 우주였다. 원인과 결과라는 필연적인 인과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표현하며 이 세상과 하나를 이루는 존재였다. 따라서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실체, 속성, 양태 등 형이상학의 핵심 개념도 이해 못한 채 그저 읽고 들으며 한없이 헤맸으나 다행히 스피노자에 정통한 어른의 풍부한 설명과 예시로 어찌어찌 네 계절을 『에티카』와 함께 보냈다.『에티카』를 읽는 독자들이 입문서와 배경 서적을 읽는 데만 수년을 바치는 것에 비하면 나는 이제 첫 걸음마를 뗀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에티카』를 통해 얻은 단 하나 삶의 정수가있다면 그것은 '코나투스(conatus)'다. 자신의 실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스피노자는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일, 자신을 더 높이 명징하게 끌어올리는 일, 더 괜찮은 일을 추구하고 몰두하게 하는 코나투스를 인식시켜 주었다. 하여 코나투스는 내게 '언제나 기쁨!'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각인되었다. 일상이나 슬픔, 혹은 좌절 속에서도 나는 '기쁨'이라는 코나투스를 갈망하며 살게 되었다. 삶에 대한 이름다움과 긍정의 철학, 『에티카』는 나의 귀중본이다. ▩ (p. 11)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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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집 · 서울』 2023. 2월(256)호, 11쪽 <내 서가의 귀중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