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한자리에
김혜숙
밀려간 세월을 꺼낸다.
삼십여 년을 장롱에 묵혀둔 속화솜 이불 한 채를 새로 탔다. 꽃솜이 깨끗해서 고운 이불 서너 개가 만들어졌다.
그중 진분홍 초록의 차렵이불 아리따운 고전古典 한 장을 감고 목화밭으로 간다.
아스라한 추억의 꽃맛 속에 너른 목화밭이 잠긴다. 굳어 있던 꽃숭어리가 부풀고 신혼의 단꿈마저 서린다.
밤은 날마다 내가 만나는 목화밭이다.
*
한가위 둥근 달이 명징하다.
가을 손이 걸어 두었으니 청명이 더할 나위 없다. 저 보름달이 소요하는 길을 따라 마음도 따라간다. 품고 있던 소망도 올리고 비칠거린 삶도 드러내 이 한밤을 속죄하고 싶다. 동심으로 돌아가 계수나무도 떡방아 찧는 옥토끼도 만나고 싶다.
*
다 벗은 나무에게서 듣는 경전. 겨울과 봄 사이 산 중턱 올라보면 대웅전 한 채가 산뼈 사이를 거닌다.
열반의 사리로 채운 나무에서 스며 나오는 법경이 어떤 우거짐이 되기까지 번민하는 눈길이 보인다. 나를 다그쳐 세상을 조금 밀어놓은 뒤, 새 법열 앞질러 만나러 산 오르다, 산 오르다.
*
모자를 깊숙이 쓰고 걷는 내가 동사무소 앞에서 눈물 글썽이는 줄 아무도 모른다. 딸이 사라진 주민등록증 한 통을 섭섭히, 섭섭히 들여다보며,
으레 '자'의 난에 담겨 있던 오누이였는데 딸이 보이지 않는다. 시집보낸 일 이제야 실감한다.
간단히 이하 여백으로 끝나 있다.
'그렇지! 딸이 함께 있던 주민등록둥본 한 통 남아 있지'
찾아내 쓰다듬으며 가보家寶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
선물 받은 꽃모종 오월로 접어들어 꽃 피었다. 하얀 순정인가.
모시적삼 살포시 받쳐입은 섬처녀들이다. 노란 꽃심지 하나씩 호롱을 밝히고 머언 바다 임 마중 마중이야.
철썩이는 파도 자락 닿을 리 없건만 수수한 꽃초롱 휘어지도록 애잔히 대롱거리는 '섬초롱꽃'이 어둑한 섬인 나를 밝혀준다.
박정만 시인의 「작은 연가戀歌」가 들려온다.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닿는다.
······
*
1985년 9월 발리 바다는 푸르게 출렁거렸다. 수평선과 삭은 모래 밀려오는 부드러움 사이 '찰깍' 풍경이 되어버린 그녀.
챙 넓은 모자가 바람을 열고 오렌지색 긴 리본이 따라간다. 어여쁜 조가비 감춘 바다 한 장이 탑승하고 물결은 여직 밀려오는 중.
들어올려진 아침 해변이 아슬히 벽에 걸리곤 했다.
*
무궁화 서너 송이 내 곁을 지나간다.
태극기 흔들며 애국가 부르며 무궁화는 언제나 그렇게 지나간다. 뛰어난 향기도 화려도 아닌 연민스러운 우리 꽃이.
깃발 송송이 하늘로 솟았건만 주눅 들어 힘이 없다. 요즘 더욱 초췌하다. 빛깔조차 흐리다.
"우리나라 꽃/ 우리나라 꽃/ 삼천리 금수강산에 우리나라 꽃."
앳된 학생들의 합창, 그때의 순수함이 얼마나 그리운지요.
*
너를 보고 있으면 자욱이 눈물이 오는 길을 알겠네. 선연히 웃음이 오는 길도 보이네. 눈물과 웃음이 손잡고 영원까지 절친하게 가리라. 그리워서 고인 눈물이 웃음기로 흘러감은 모정의 몫, 그런 힘 쪽으로 날마다 기울며 산다.
*
구도의 길로 접어든 난蘭이 나를 본다. 내가 난을 본다. 고요의 정점인 양 연록의 맑은 꽃을 머금고 있다. 번민하는 것들을 난잎으로 자르고 나도 꽃처럼 적요해진다. 몇 개의 곡선만으로 가부좌한 저 단아를 닮고 싶다.
*
그늘은 기다려주는 곳이다. 들뜨지 않고, 군소리 않고 고요히 쉴 곳이다. 경치도, 산울림도, 바람도 슬며시 쉬는 곳이다. 빛나지 않는 그가 빛남을 위해 받쳐주는 노고를 평화스런 인내라 해도 좋으리.
온갖 것을 간직하는 품성은 숨어 있는 듯, 손 닿지 않는 듯해도, 사유思惟는 늘 그 속에 있기에, 서늘함과 따스함이 한데 어우러진 고요를 사랑한다. 명상의 속뜰 같은 그런 그늘을 사랑한다.
*
영혼의 반을 그림자에게준다. 나보다도 더욱 나를 잘 아는 벗이 아닌가. 나의 흔적을 묵은 너에게는 남길 터이다. 홀로가 홀로를 견뎌내는 애젖는 위로 때문에 영혼 반을 나누기로 한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나를 찾고 너는 너를 찾고 서로를 찾으며 헤맨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잎새와 꽃처럼.
그림자여, 나를 따라다니느라 더러, 온몸 젖는 이슬도 지녔으리. 물 위에 기름처럼 떠돌기고 했으리. 시詩의 가지에 걸려 밤을 하얗게 새울 때 설핏, 네가 아파 보이던 기척. 언제나 소슬한 내 그림자에게 영혼의 반을 내민다. ▩ (p. 14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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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숙 산문집 『뒤안길 여미다』에서/ 2022. 10. 2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김혜숙/ 경남 통영 출생, 세종대 음대 기악과 졸업, 1988년『현대문학』 추천완료, 시집『너는 가을이 되어』『내 아직 못 만난 풍경』『바람의 목청』『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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