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이승하_산문집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사랑하였으므로 나는 괴로웠다」: 한하운과 R

검지 정숙자 2023. 3. 10. 03:16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괴로웠다

       - 한하운과 R

 

     이승하

 

 

  한하운이 세상을 떠난 지도 50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그의 「전라도길」「손가락 한 마디」「죄」「파랑새」「나혼유한癩魂有恨」 등을 읽을 때면 심호흡을 여러 번 하게 된다. 예순을 못 채우고 간 한 시인의 생애가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점철되었는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중학교(이리농림학교) 5학년 때 자신이 '문둥이'로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은 음성나환자였기에 겉으로 보기에 크게 표시가 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궤양이 얼마나 심하게 온몸을 덮쳤는가는 회고록 「나의 슬픈 반생기」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루는 궤양이 얼마나 되는가 세어보았다. 적어도 850군데에서 900군데나 되어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퍼져 있는 것이다. (당시부터 10여 년 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인천시 간석동의 600명 환자 중에서 나같이 궤양이 많은 환자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마치 밤하늘에 별이 무수하게 뿌려져 있는 것같이 나의 온 몸뚱이에는 궤양이 뿌려져 있었다.

 

  한하운은 회고록을 월간 『희망』에 1955년 5월호부터 1957년 1월까지 연재했는데 어머니의 임종을 묘사한 뒤 이런 말을 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져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맏상제이면서도 그는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이 와 장례를 치르는데 나환자인 자기가 얼쩡거리면 그네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운은 집 근처 숲을 여러 날 울며 배회하는 동안 밥을 먹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가 밤이슬을 맞고 깨어났다. 육신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마음의 아픔을 내 어찌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처절한'이나 '비통한' 같은 수식마저도 군더더기 말이 될 뿐이다.

 

  한태영(한하운韓何雲의 본명, 1920-1975, 55세)은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에서 태어나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와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 도쿄 성계고등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으로 유학을 가 북경대학 농업원 축목학과를 졸업했으니 대단한 엘리트였다.

  함경남도에서 열아홉 명이 이리농림학교에 응시하여 자기 혼자 합격했다는 말이 거짓일 리 없고, 북경대학에서 주논문으로 「조선축산사」를, 부논문으로 「조선우朝鮮牛의 지방적 체격 연구」와 몇 가지를 썼다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총독부 도서관과 고서점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고서를 수집하여 논문의 뼈대를 추렸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태영은 그 시대에 흔치 않은 농업학자였다.

  한태영에게 한센병(나병) 증세가 나타난 것은 수의축산과 졸업반에 다닐 때인 1936년이었다. 그는 성대부속병원에서 나병에 걸렸다는 선고를 받고는 학교에 휴학계을 내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신계사 근처의 여관에 방을 하나 얻고는 날마다 온정리의 온천에 다니며 온천욕으로 병을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제와 독일제 나병 치료약도 갖고 들어갔지만 약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열여덟 살 미소년이었던 태영에게는 'R'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한하운은 회고록에다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니셜로 표시한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누이동생의 친구였다. 그녀는 태영이 한마디 말도 없이 잠적하자 여름방학 때 금강산 신계사를 찾아간다. 학교에 잘 다니고 있던 남자친구가 느닷없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당혹스런 마음에 찾아갔던 것이다.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계기가 나병이었으니 기막힌 일이다.

  태영은 R 앞에서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 자신이 눈물을 보인 이유를 밝혀야 하니까.

  태영은 자신을 찾아 먼 길을 온 R에게 비로봉 구경이나 시켜주기로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마의태자 능 앞에서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을 고백하려 했지만 능에 당도했을 때 R이 마의태자의 슬픈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다음 날 태영은 집선봉 기슭 우거진 숲가를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마침내 자신이 나병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나는 누구와 사랑을 하거나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라고 천형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나를 잊어달라고 R은 태영의 말을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꽃가지의 잎사귀를 뜯어서 물에 띄워 보낸다. 비감에 찬 태영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R이 대꾸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슬퍼져요. 저는 태영 씨를 일생의 남편으로서 언약한 이상 태영 씨가 불운에 처했다고 버리는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닙니다."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던 태영의 마음을 R은 이러한 간곡한 설득으로 돌린다.

  R은 그날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병에 좋다는 약을 구해 태영에게 주었으니 이를 '순애'라고 해야 할까 '순정'이라고 해야 할까. R은 그 이후에도 태영의 병을 고치고자 전심전력을 다한다.

  태영은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성계고등학교로 진학한다. R은 태영을 따라 일본에 갔고, 일본에 가서도 정성을 다해 약을 구해가며 태영을 보살핀다. 하지만 이국에서의 불규칙적인 생활은 병의 재발을 부추겨 3학년 때 급거 귀국하게 된다.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가 몇 달 정양하는 동안 차도가 있자 이번에는 중국으로 간다. 그는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비로소 시에 눈을 뜬다. 태영은 중국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운명의 병마에 신음하면서 남은 여명을 문학에 귀의하지 않고는 나를 구원할 길이 없음을 나의 심혼에서 백열같이 내연하였다.

 

  태영의 중국 생활은 학업과 투병이 아니라 술과 문학의 나날이었다. 심신이 피폐해지자 병세가 다시 험해진다. 고국에 돌아와 다시금 금강산에서 몸을 추스른 하운은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취직하여 알하다 도내 장진군으로, 다시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한다.

  광복을 맞게 되는 1945년, 또다시 병이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함흥 본가로 가서 치료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다. 태영은 이 무렵부터 남은 생을 문학을 위해 바치기로 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태영에 대한 R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6년 태영은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나병환자라는 이유로 곧 풀려나게 된다. 1945년 8월 소련군에 의하여 점령된 북한에 소련군정이 실시되면서 각 도의 도청은 소련군의 군정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 1946년 초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도, 도민위원회가 들어설 도청은 이미 소련군이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남중학교의 교사校舍를 청사로 차지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모교사수母校死守를 외치며 이에 항거하였다. 한편 그 무렵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의 기계가 어디론지 뜯겨 가고, 식량배급이 끊기면서 시민들의 불평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시민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사건이 함흥학생사건으로 보완서원의 발포로 학생 1명, 시민 2명의 희생자가 났고 보안서원도 3명이 사망하였다. 사건 진압 후 49명의 학생과 시민이 검거되었고 그중에 한태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에 태영은 잠시 월남하여 약을 구해서 R이 있는 북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만다. 원산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탈옥하여 다시 월남, R과는 영영 헤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의 이야기는 『나의 슬픈 반생기』에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다.

  R과 태영을 영영 이별하게 만든 장본인은 태영의 남동생이었다. 그는 형과 R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일성 암살을 모의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체포된다. 이때 R도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므로 아마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처형되었을 것이다.

 

  태영은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시 「전라도길」외 12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다. 이때 필명을 한하운으로 짓는다. 같은 해 5월에는 시 25편을 묶어서 첫 시집 『한하운 시초』를 발간하고 57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병마와 싸우는 한편 시를 열심히 쓴다. 시집 『보리피리』『한하운 시 전집』,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회고록 『나의 슬픈 반생기』를 발표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육신의 고통과 세상의 질시를 감내해야 했고, 회한과 허무감에 젖어 시를 썼다.

  남으로 온 이후 사회활동도 활발히 한다. 1952년에 신명보육원을 설립한 데 이어 1958년부터는 청운보육원을 인수해 운영한다.1954년 대한한센총연맹위원장에 취임하고 1959년에 한미제약회사를 설립, 회장에 취임한다. 1961년에는 명동에 출판사 무화문화사를 설립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란다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들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문-

 

  이 시는 한센병을 앓는 모든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한여름 더위 속에 전라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그 누가 알까.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소외감과 절망감이다. 한센병은 사람들이 보면 징그럽다고 외면하는,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이다. 혈액을 통해 전염이 되는 병이며 한 번 걸리면 회복이 불가능한 병이다. 그래서 이 병을 천형이라고 한다. 이남에서 사회사업가와 제약회사 사장으로 살아간 한하운은 북에 두고 온 애인 R을 못 잊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R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사랑의 시를 느끼고 그 사랑의 시는 나에게 다시, '한 세상을/ 한 세월을/ 살고 살면서'에서처럼 삶의 욕망이 치솟는 '생명의 노래'를 주었던 것이다. 또 나는 생각에 잠긴다. 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욱이 나 같은 경우에는 R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심연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R이란 여인이 환자인 자신을 사랑해준 그 사랑의 힘으로 절망하지 않았다는 한하운. 그는 죽는 날까지 전라도 길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걸어간 시인이다.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R을 생각하면서, 고통의 극점에서도 첫사랑을 잊지 않았던 시인이기에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전율한다.

  한태영은 시를 쓰면서 한하운이란 필명을 갖게 되었다. 구름 따라 어디로 흘러가고 싶었던 것일까.

     -전문(p. 69~77) 

 

    * 블로그 주: 한용운 시인 尊影과 시집 이미지 등은 책에서 열람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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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을 보며 노래하다

 

    이승하

 

 

  태어난 모든 것들에게 남아 있는 일은

  죽는다는 것

  죽을 땐 응당 죽겠지만

  그대

  아프지 말라

  나처럼

  아프지 말라

 

  북한의 그대

  살아는 있소?

  소식 한 자 전할 수 없는데

  이 세상에는

  못 만나 병난 사람들이 이렇게 많소

  고아가 아니면 과부

  환자가 아니면 미감아

 

  못 만나는 우리는 남남북녀

  나비도 살아서 저렇게 날고

  고양이도 짝을 찾아 저렇게 우는데

 

  북으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혀

  기가 막혀

  나 한하운 오늘도

  북으로 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다오.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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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하 산문집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에서/ 2022. 4. 18. <달아실> 펴냄

  * 이승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시집『사랑의 탐구』『뼈아픈 별을 찾아서』『생애를 낭송하다』등, 시선집『공포와 전율의 나날』, 평전『마지막 선비 최익현』『최초의 신부 김대건』『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청춘의 별을 헤다: 윤동주』, 문학평론집『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세속과 초월 사이에서』『욕망의 이데아』『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등, 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