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김혜숙_ 산문집『뒤안길 여미다』/「떠나고 남는 것」

검지 정숙자 2023. 2. 26. 02:45

<에세이 한 편>

 

    떠나고 남는 것

 

    김혜숙

 

 

  신선한 설렘으로 다가서는 가을 기운을 만난다.

  이맘때쯤이면 가라앉기 시작하는 태양의 열기와 더불어 우리의 마음도 차츰 순연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하盛夏의 계절에 치솟던 열기도 불쾌지수도 차츰 누그러들어 까닭 모를 적막이 엄습하기도 한다. 좀 더 스산해지는 깊은 가을이 오기 전 떠나고 남는 것들에 하나씩 길들여져야 함을 느낀다. 허접스레한 일상용품에서부터 마음까지도 청정한 가을 햇살에 널어 말릴 것을 말리고 접어둘 것은 접어두어야 할 때가 아닐까. 무딘 붓도 다듬어 스쳐가는 공허로움에 한 획 지워지지 않는 영혼을 새겨둠도 잊지 않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떠나고 남은 이 끊임없는 순리純理,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에서 오는 것임에. 계절은 계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온갖 희로애락이 끊일 사이 없기에 무상함이 더욱 심층을 파고든다.

  올여름 친정어머니는 40여 년 거의 전 생애를 몸담고 살아왔던 집을 떠나 아파트 한 칸을 사서 이사를 가셨다. 유난히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병이리만치 강해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신발에서부터 옷가지, 오래된 가구, 잡동사니, 어머니의 손길이나 우리가 쓰던 것들이며 이 구석 저 구석 넣어놓고 쓸모없고 낡아 미관을 망쳐도 그것을 속시원히 내다버리거나 치우지 않아 우리 형제들은 늘 못마땅해했고 그런 일로 화제를 꺼내면 권유하다 거절당함은 물론 우리마저 없애지 못하게 해 아예 포기하고 말아버리곤 했다.

  그렇듯 몇십 년을 버리지 못하던 묵은 짐과 삭을 대로 삭은  옛것들, 묵힌 추억마저 하루아침에 버리고 필요한 것들만 담아 싣고 이사를 하신 것이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팔지 않고 버티어 왔던 집이었고 어머니의 생애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끌고 온 삶의 수레바퀴가 너무나 깊이 박힌 집이었기에 미련과 아픔, 간직했던 정 때문에 많이도 우셨다. 어느 때고 한 번은 버리고 떠날 일이언만 살아생전에 떠나지 않으리라던 집이었기에 당신의 슬픔은 더욱 컸으리라. 나 역시 쉽게 단안을 내려 팔고 만 것이 영 믿어지지가 않았고 실감도 안 나다가 오늘, 파아랗게 뒤집어쓴 페인트 칠 때문에 내 친정집이었고 아이들의 외갓집인 저 집이 비로소 남의 것임을 확인케 된 듯하다.

  그동안 벽을 헐고 구조를 바꾸고 하는 양을 곁에서 빠안히 보고 알았는데 이런 감정이 들기까진 않더니 집 외양을 파아랗게 입히고 보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여지없이 부서지는 추억들. 차례로 그 집에서 출생하고 자라 출가한 형제들. 부친과 남동생을 잃은 집. 젊은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기까지 사셨던 집. 해맑은 시절의 꿈을 키우던 집. 날이 갈수록 낡아가도 너무 깊은 연이 있어 가슴속 고향이던 집. 깡그리 밀어부치고 아예 새 건물이 들어섰다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는 저  흔적이 지워지고 묻힌 정마저 잊힐 일이던가. 몸체는 그대로 두고 군데군데 성형수술이다 보니 지나간 삶마저 넘겨다 보면 보일 것 같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머니가 계실 것만 같았는데 이제 저 푸른 빛깔이 뚜렷이 확인시키듯 버티고 있는 마당에야 나는 애써 너를 잊어야 한다.

  너에 비치는 과거를 보지 말아야 하고 생각조차 지워야 한다. 저 생경한 빛깔에 추억을 담을 수 없고 달라진창문에서 정겨움을 읽을 수야 없는 일.

  아침에 피어 저녁이면 시드는 꽃과 같다는 인생을 떠올림은 삶이 뜬구름임을 자인하는 나이에 이르렀음이니. 떠나고 남는 것, 손 들어 배웅하는 이의 마음으로 떠나는 것을 보낸다. 사라짐과 남는 것의 냉혹한 별리別離! 때 절은 생애의 끝은 싫어도 다가온다. 홀로 돌아갈 길임을 이 세상 여정은 말하고 있다. 쓸쓸한 이 부대낌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남아 있는 저 집의 형체를 보고 또 보면서 잊는 연습, 떠나는 연습에서 길들이자. 알 수  없는  마감의 그날을 위해서.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오는 날, 무딘 붓을 꺼내 한 장의 맑은 가을로 싼다. 조용히 붓의 마음이 담긴다. 마음의 조각을 싸서 둘 이 은혜마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기에 꽃씨처럼 비장하고 싶다. 떠나고 남는 것의 마지막 위로이고 싶다. ▩ (p. 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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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혜숙 산문집 『뒤안길 여미다』에서/ 2022. 10. 2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김혜숙/ 경남 통영 출생, 세종대 음대 기악과 졸업, 1988년『현대문학』 추천완료, 시집『너는 가을이 되어』『내 아직 못 만난 풍경』『바람의 목청』『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