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서평

인간의 대지에 빛을 전하는 하이퍼 노마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 13. 20:33

 

  <서평, 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시작, 2007년)>

 

 

   인간의 대지에 빛을 전달하는 하이퍼 노마드

 

     정숙자

 

 

   시는 신이 지상에 숨겨놓은 보물이다. 어디에든 숨겨져 있지만 아무나 찾을 수는 없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보아내려는 노력을 가진 자만이 간헐적으로 발견해낸다. 그것을 우리는 상상력의 확인으로 삼는다. 또한 영롱한 영감을 얻었다 하더라도 작품화의 성공에 도달하려면 탄탄한 이론에 힘입지 않으면 안된다. 기교란 지나치게 드러나면 천박하지만 솔기를 감출 수 있을 정도의 문체라면 당연히 좋은 시의 근간이 된다. 한때 시인들은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나 ’어떻게‘는 분리되어질 사안이 아니고 합쳐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길상호 시인의 두 번째 시집『모르는 척』에서 「길상號를 보았네」라는 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인터넷 화면 속에 떠다니는 사진

  길상號를 만났지

  어느 바다에서 밀려왔는지 개펄에

  닻을 내린 배 한 척

  마냥 신기해서 스크랩을 해두고

  보다가, 보다가, 눈물이 났지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

  기우뚱, 일어서지 못했지

  펄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지

  바다로 이어진 물길 마르면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길상號는 튜브를 몇 개 부레처럼 달고

  헐떡이고 있었지

  밀물이 들지 않는 모니터 속에서

  힘차게 힘차게 노를 저어도

  너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지

  바다가 없어도 물고기 건져야 하는

  그 밤 나는 가여운 어부가 됐지

                                                                   -「길상號를 보았네」전문

 

   현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인터넷 검색어에서 자신의 이름을 클릭해 보았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 떠다니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들을 만나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한 척의 배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리라.「길상號를 보았네」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아! 하고 자신도 한 사람의 노마드(nomad)임을, 이 시가 비단 길상호 시인만의 자화상이 아니라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단체초상화라는 화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현상에 대한 투시력과 위트시즘, 직조능력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시인의 이름 끝字가 ‘號’字 였기에 생산된 작품일 거라고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해도, 그는 다른 제목 아래 「길상號를 보았네」와 똑같은 이미지를 그려냈을 것이다.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기우뚱 일어서지 못했지”라든가 “길상號는 튜브를 몇 개 부레처럼 달고 헐떡이고 있었지” 등의 문맥을 통해 힘겨운 현실 토로와 모더니티가 진행되었다. 선박의 부분일 리 만무한 ‘다리’ 또는 ‘부레’를 연결시킴으로써 이 시는 쾌감과 율동미, 가파른 삶의 단면들을 함축/확충으로 이끌었다.

 

 

   고구마에 싹이 돋았다/물 한 방울 없는 자루 속/썩은 내 풍기는 저 무덤 속에서/새파랗게 싹은/잘도 자랐다,/탯줄을 자르기 전/어미를 먹고 자라던 기억이/나에게도 있다

                                                                                   -「어미를 먹은 기억」전문

 

   이 시는 짤막하지만 시집 전체에서 가장 여운이 길다. “어미를 먹”었다고 말문을 트는 데서부터 <전생→대지→육체→영혼→우주>로까지 퍼져나간다. 이는 무참하게 썩어버린 고구마에 대한 측은지심이며 생명을 잘 간수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이고, 자아의 근원에 대한 감사와 참회, 승화이다. 시가 문학의 정수라고 하는 까닭을 이 시는 조용히 검증해주고 있다. 이 시는 시간과 공간, 심적 물리적 현상들을 현현하면서도 군더더기 한 올 덧대지 않은 역량과 인간애의 표출이다. 길상호 시인의 깊고 포근한 아니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상에 널린 아픔들을 심층부에 받아들여 빛으로 바꾸어주려는 의지가 삼엄하다. 시가 곧 사람이라는 금언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모르는 척, 아프다』전문

 

   의존 명사 ‘척’은 ‘체’와 같은 의미로서 호감보다는 비호감으로 쓰일 때가 더 많다.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등등 실제를 뒤에 숨긴 은닉형 언어군에 속한다. 그런데 길상호 시인은 『모르는 척』이라는 제목을 버젓이 표지에 내걸었다. 보편적인 ‘척’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전봇대를 모티프로 세웠다는 게 허를 찌르는 기습이다. 쌩떽쥐뻬리가 기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면, 전봇대에 인격을 부여한 길상호 시인 역시 그와 등가 관계를 수립한 우리 곁의 시인이다. 도심의 전봇대는 술주정꾼들이 오줌을 내갈기거나 구토를 해대어도 속수무책 당하고만 서 있는 존재다. 그러나 그 전봇대는 가해자인 인간의 대지에 빛을 전달하기 위해 서 있는 몸체이다. 현재 국내 유수 문예지의 편집장이기도 한 길상호 시인의 마음주소가 혹 「모르는 척, 아프다」아니었을까. “모르는 척”의 미학은 “아프다”에서 결정된다. “우우웅…”으로 표현된 울음소리는 빛을 송전하는 환치음일 터. 타인에게 1루멘(lumen)의 빛, 또는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모르는 척” 인내해야만 가능해진다. 표제시 「모르는 척, 아프다」는 그러한 길상호 시인의 이성(理性)이며 본성(本性)의 발화(發話)일 것이다.

 

   길상호 시인은 첫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로 현대시동인상과 이육사문학상-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금년 2월 <천년의시작>에서 출간된 『모르는 척』은 시인의 영혼체중이 잘 느껴지는 시집이다. “길상號” 식의 표기법을 빌리면 『모르는 척』을 ‘모르는 척(船)’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자신의 애환과 어두운 세상을 보살피려는 시인의 인자는 이미 좋은 시의 골격을 갖춘 셈이다. 좋은 시란 결국 인간을 보듬는 시이며 삶에 위안을 주는 박카스이니 말이다. 『모르는 척』에는 앞서 인용한 시 외에도 「구두 한 마리」, 「돌탑을 바치는 것」, 「열매 떨어진 자리」,「붉게 익은 뼈」, 「개미의 바느질」, 「서울이여, 안녕」등 다수의 가작이 실려 있다. 길상호 시인의 시격은 찬찬하고 진솔하며 (새로움이라는 미명하에 떨치고 나대는) 겉수작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할머니에게 연구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과학자가 그럴진대 만인이 공유하는 문학에 있어서랴. 30대 중반에 들어선 “길상號”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문학/인생역정을 펼치게 될 것이다. 풍랑과 암초를 모두 극복하여 오딧세이의 신화 이루어내길, 사랑에 있어서는 페넬로페 신화를, 그리고 인간을 잃지 않는 하이퍼 노마드로서의 신화와 흔들림 없는 전봇대 신화의 빛나는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기대한다, -모르는 척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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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지』2007.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