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금녀 시집 『길 위에 시간을 묻다』(문학세계사,2012)>
한 끼의 식사와 아버지의 뼈
정숙자
하늘은 깊어서 맑고 땅은 둥글어서 따뜻하다. 사람의 마음도 깊으면 맑고 둥글면 따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둥긂/맑음/따뜻함으로 살아간다. 다만 인간의 수명이 지구만 못하고 지구의 차원이 우주만 못하다는 점에 경계가 있을 뿐. 그런 대차대조 그래프 아래 인생여조로(人生如嘲露)라는 시적 압축 또한 오랜 세월을 거슬러 성립/회자되었으리라. 그렇듯 단명하고 나약한 인간이지만 오호라! 마음과 지혜만은 넓힐수록 끝없고 치밀하기로 들어도 막능당(莫能當)이니 어찌 대자연에 적응치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적응의 첫머리에 길이 나고, 길의 연장선상에 여행이 있었음이니,
-자애로운 어머니 강가 신(神)이여,
당신이 있어 그동안 내 삶이
풍요로웠나이다-
노천 화장장 가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머리 풀고 이승을 떠나는
힌두교인들의 마지막 인사가
흐르는 강물에 스며들 때
어슬렁거리던 견공들
타다 남은 정강이뼈 나누어 뜯는
한 끼의 식사
지상은 즐거워라
저만치서
명상에 잠기는 운동화 한 짝.
-「한 끼의 식사」전문
위 시는 이번에 상재한 최금녀 기행시집 『길 위에 시간을 묻다』의 서시로서 <인도>편이며 강가 강(갠지스 강) 언덕에 계단식으로 설치된 수십 개의 노천 화장장(가트:Ghat) 주변 풍경을 담아낸 작품이다. “어슬렁거리던 견공들/ 타다 남은 정강이뼈 나누어 뜯는/ 한 끼의 식사”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철학이 배어난다. 참 기막힌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전쟁으로 이길 수 없는 나라가 인도라고는 하지만 그 정신의 높이가 어느 정도이기에 덜 태운 정강이뼈를 견공들에게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화자는 담담하거나 대담한 필치로 1.2.3연을 그려나갔지만 막바지에 이르러 “저만치서 명상에 잠기는 운동화 한 짝.”에 만감을 기탁했다. 그리고 바로 그 결구에서 독자와의 공감대를 선명히 획득한다.
박지원의『열하일기』「태학유관록」에서 한 대목을 빌리자면 “공자께서는 두 가지를 탄식하여, ‘글로써 말을 다 할 수 없고, 그림으로써 뜻을 다 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일찍이 성현이 간파한 미비를 최금녀 시인도 느꼈음일까. 『길 위에 시간을 묻다』는 글이 다하지 못하는 구석을 그림이 보충하고, 그림이 다하지 못한 이면일랑 글이 보완할 수 있도록 엮은 책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산문으로 정리한 기행문도 합본되어 있으므로 시에서는 긴축미가 산문에서는 스토리텔링의 풍성함이 장점으로 보태진다. 길이 길을 잇고 역사가 역사를 이어받는 동안 인류는 여행이라는 문화를 끊임없이 확장/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은 감히 대자연을 노래하고 기록했으며 대대손손 후세에게 전통과 정보와 언어를 물려줄 수 있었다. 기행문이 없었다면 어떻게 타국을 알며 외교가 가능했을 것인가.
한 권의 시집은 그 시인의 성품과 역량, 비전까지의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막 출간된 한 권의 시집은 그 시인의 문학적 현주소와 인격적 혈액형이 공개되는 교집합이요, 합집합이라 할 만하다. 독자의 눈은 평면 위의 글자들을 섭취하지만 그 글자들이 뇌에 닿는 순간 (보르헤스가 차용한) ‘알렙’으로 둔갑하여 그 시인의 총체를 보여준다. “-강가 신이시여,/ 친구의 며늘아기에게 태기가 없습니다/ 태의 문을 열어주소서-”(「푸자에 한 표」부분). ‘푸자’란 갠지스 강가에서 올리는 힌두교인들의 저녁예배라고 한다. 먼 여행길에 자기 자신도 육친도 아닌 친구의 며늘아기를 위해 간곡히 기도드릴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강가 강물 위에 꽃촛불을 켜고”(산문「인도, 한 조각의 자취도 남지 않는다」) 기도해주는 그런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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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심양에서 다섯 시간
조선말 하는 1만 명이 입양아처럼
눈치껏 살고 있는 땅이었다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 같은 곳
우리의 왕이었던 분이
그 신하들이
날리지 못한 화살촉을
통증으로 끌어안고 묻힌 곳
37톤 비(碑)에 새긴
주술(呪術)문자 1700자
고추장에 고추 찍어 먹는 사람들은
함경도 사람보다 더
함경도 사투리를 썼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후손들이
그 땅에서 키운 멧돼지 고기
돌판에 구워
서로 입에 넣어주며
안녕을 빌었던 곳
오랜만에 내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혼백들도
얼굴을 펴고 한 잔 받으셨을 밤.
-「아버지의 뼈」전문
핏줄이라는 것, 죽음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핏줄, 생각해보면 인류를 오늘날까지 이끌 고 온 동력이 아닌가 싶다. 여든여섯의 아버지가 눈 감으며 내게 남긴 유산이 있다.
“고향에 가거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아뵈어라.”
실향민 외에는 넘겨받지 못하는 슬픈 유산이리라.// 우리에게 가호적(加號籍)이라는 말 이 생겼을 때가 있었다.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에게 내린 특혜였겠다. 그때부터 출생지가 서울로 변했다./ 창씨개명 같은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지.
학교에 입학할 때, 신원을 확인받아야 할 때, 이력서를 쓸 때, 우리는 얼굴 가리고 고향을 슬쩍 서울이라 적었다.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일제하에서도 창씨개명만은 하지 않았었는데…….// 본적지를 묻는 란에서는 늘 숙연했다. 어딜 적어야 하나? 아 참 서울이지. 입시문제처럼 신중하게 서울로 기재했던 시절, 이북이라 적으면 한 번 더 쳐다보던 시절, 지금도 우리 는 가호적 인생이다. 가호적으로 사는 이상 몇 십 년이 지나도 타향일 수밖에 없다.
-산문「압록강, 바람에게도 밥 사주고 싶다」부분
같은 소재로 빚어낸 한 편의 시와 산문의 일부를 나란히 옮겼다.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이런 수난이 곧 민족적 비극이라는 인식에 이의가 없으리라. 이 뼈아픔은 비단 화자의 가문에 국한된 불행이 아니라 우리 하늘에 짙게 새겨진 무쇠그늘이다. 하지만 필자만 하더라도 그 격랑을 몸소 겪지 않았으므로 잘 알지 못한다. 화자야말로 이렇듯 증언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 또한 국사와 함께 간직되어야 할 중요 자료다.
최금녀 시인의 기행시와 기행산문은 인도, 네팔, 미국, 유럽, 몽골, 아시아, 중남미,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이어졌다. 여행 자체만으로도 숨찬 일이거늘 도착지마다 작품을 빚어 책으로 묶었다는 사실이 ‘정말 시인’임을 실감케 한다. 산문「중국, 늦은 조문-윤동주 생가」를 읽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이는 필시 최금녀 시인의 붓이 깊고 따뜻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었음이니 그런 경우가 바로 글로써 ‘만남’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생도 여행이요, 넘겨지는 하루하루 역시 길 위에 풍장 되는 시간의 연속이다. 어느 땐 비탈을 만나고 언젠가는 우박을 맞으며 일진광풍 병마에 시달리는가 하면 예기치 않은 블랙홀 속으로 스며들어버리기도 한다. 그 운명의 두루마리 위에서 우리는 별의별 체험을 성숙의 기회로 삼는다. “길 위에 시간을 묻”는다는 투영은 그대로 절묘한 시이자 진실이다. 괴테도 어디선가 피력하지 않았던가. “모든 인간은 길 위에 있다”고.
가는 곳마다
어깨에 날아와 앉는
낙엽 같은 손들
먹을 것 없었던 우리의 70년대
부엌이건 방이건
파리는 왜 그리 들끓었는지
밥 때 되면
용케도 알고
밥 위에 날아와
두 손을 싹싹 비비던
그 성가신 것들
밥 먹다 말고
주먹질하는 나를 보고
얘야, 산목숨은 모두 부처님이다
그리운 어머님 법문.
-「파리부처님」전문
그렇다. 여행의 목적은 심신의 정화이며 책을 읽는 행위는 내면의 탐사이자 고양(高揚)이다. 천체가 넓다하지만 지구와 똑같은 행성이 어디 또 있겠는가. 태양과의 적정 거리에서 습도/온도가 알맞아 수많은 생명이 어울렸으니 물벼룩 한 마리일지언정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계의 한 고리이다. 「파리부처님」을 들여다보니 평소 최금녀 시인이 지닌 측은지심의 발원지가 어디였는지 헤아려진다. 화자는 “그리운 어머님 법문”이라고 매듭지었지만 실인즉 최금녀 시인 자신의 심성이 핵인 것이다. 잉크와 종이를 더 쓰지 않고도 이렇듯 깊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내다니! 구태여 머리를 날카롭게 벼리지 않아도 이심전심 진심이 전해져온다. 이제 잠시 멈추어 『길 위에 시간을 묻다』를 읽고 띄웠던 필자의 편지를 공개코자 한다. 아무래도 이 사신(私信)이 장문에 못지않은 아우라일 것이기에.
최금녀 선생님께// 귀한 책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경철 선생이 ‘원융무애’라는 말을 빌려다 쓰셨던데 참으로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뼈’를 베껴볼까 하였으나 개인의 심상보다는 보편성 확립에 더 큰 비중을 두어 ‘한 끼의 식사’를 옮겨 적었습니다. ‘가트’에서 느낄 수 있는 철학으로는 이 시보다 더한 광경이 없을 듯하군요. 사진으로는 p.110쪽의 구름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철원 기자님의 일러스트도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공든 책이에요. 저는 한자리에서 세계 일주를 했습니다 -그것도 에센스만을. ‘늦은 조문-윤동주 생가’를 읽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라는 문장에서는 어찌나 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운지…. ‘가호적(加號籍)’에서도 뭉클했고요. 두루두루 문호들을 만나는 기쁨과 선생님의 깊은 사유도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p.178-"핏줄이라는 것, 죽음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것." p.179-"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한솥밥." p.220-"레닌과 스탈린의 동상,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의식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대학노트 두 쪽을 정리했는데요. 오늘 제 가슴에 꽂힌 한마디는 p.225-“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살아갈수록 뼈 속으로 들어오는 잠언! 축하드립니다. 여행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이렇게 멋진 결실을 거두시다니!// 2012.9.17-23:10 정숙자 올림.
에필로그) 어설픈 펜을 들어 『길 위에 시간을 묻다』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는지 조심스럽다. 차제에, 최금녀 시인의 다음 여행을 위해 기도를 예약해 두기로 한다. 오래 전에 읽은 구절인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출전은 잊고 내용만이 오롯하다.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세 가지를 빌어줘야 한다. 그 첫째는 건강할 것. 둘째는 날씨가 좋을 것. 셋째는 지갑이 든든할 것.” 얼핏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 가지는 여행자에게 결여되어서는 안 될 절대적 가치이다. 단기간의 여행뿐 아니라 인생여정에 비추어도 그 기원과 축복의 값은 변하지 않는다. 기행서의 첫줄에 꽂힌『동방견문록』의 대미 또한 “우리들 폴로 일행이 귀국할 수 있었고 또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인 것으로 믿는다. (…) 신에게 감사할지어다! 아멘!” 이라고 장식되어 있다. 『길 위에 시간을 묻다』에서도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천명한 심급이 그와 다르지 않으니, 우정과 진심을 담아 이 에필로그를 일상의 프롤로그에도 연결해 둔다. “매년 매월 매일 매 시간이 행복하시기를! 인샬라!"
*『시와표현』2012년 겨울호 231쪽~/ '시집 아케이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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