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영숙 시집 『하늘새』(황금알, 2007년)>
작별, 그 영원한 아픔
정숙자
간간히 우체함에 시집이 꽂힌다. 겉봉을 따면 이제 막 부화한 시집의 생명이 느껴진다. 모든 시집엔 날개가 있고, 그 앞날개엔 저자의 약력과 사진, ―뒷날개엔 펴낸 곳의 시집 시리즈가 깃털을 드러낸다. 표지라고 명명된 한 쌍의 날개가 세상을 향해 힘찬 날개를 편 것이다. 편집자가 신중을 기했을 목차도 소중하긴 매한가지. 갓 깨어난 시집은 조심스럽게 본문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저자의 심정과 심성, 의도와 의지, 답보와 진보, 문장과 문체, 현상과 현실, 진정과 진의, 욕망과 욕구 심지어는 작가로서의 미래까지가 윤곽을 제시한다. 그러나 독자 개개인의(혹은 어느 단체의) 평가잣대가 정확한 눈금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시에 있어서만은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나 도량형 원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시는 다양성을 보유하는 한편 유일무이의 개성을 창출할 수가 있고, 또 언제 어디서 누구이든 신기원을 마련할 수도 있다.
장날이면 외할머니는 우셨다 “하늘로 솟았나 땅속으로 숨었나”하얀 무명 저고리에 떨어지던 붉은 꽃잎들, 지게 뒷짐에 꽂혀 있던 진달래 꽃잎, 꽃잎 한입 가득 물고 통치마 펄럭이던 아이는 화들짝 놀라 섬돌에 넘어졌다 습자 시간에 정성들여 쓴 아버지 세 글자가 책가방 속에서 자꾸만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하얀 치마폭, 얇은 화선지에 소로시 담겨지던 파르스름한 아이들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아버지의 먹그림 앞에서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장날이면 외할머니는 우셨다 유월의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던 앞마당, 석류와 장미꽃이 만발하던 뒤란, 배꽃이 환하게 피어나던 우물가, 온통 짙은 먹물을 뿜었다 나는 먹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밤새 호야불 밑에 습자지를 꺼내놓고 먹을 갈았다
또 봄날이 와도……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아버지 세 글자를 먹물이 번지지 않게 습자지에 쓸 수 있다 내가 써 놓은 글자들을 보시며 여든의 어머니는 이제야 우신다 내 마음에 묶어놓은 수만 장의 습자지 뒷면에 아버지의 모습이 얼비친다면서
-「또 봄날이 와도」전문
정영숙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하늘새』에서 「또 봄날이 와도」는 가장 진폭이 큰 시이다. 이 한 편의 자장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저자가 접합된 삼대(三代)의 음영을 그린 수묵담채화다. 짧지 않은 전문을 여기 옮겨 적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밤새 호야불 밑에 습자지를 꺼내놓고 먹을 갈았”던 어린이는 이제 이순을 넘어선 예술가이다. 한 편의 시는, 아니 한 사람의 아티스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먼먼 하늘로부터 출발한 별빛이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아버지 세 글자를 먹물이 번지지 않게 습자지에 쓸 수 있다”, ―담박하고 간결한 축약이다. 고통스런 시간의 경과를 군더더기 없이, 종이 중에서는 제일 얇은 습자지 위에 꽃으로 피워냈다. “새 학기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 빈 칸의 아버지는 나를 불구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내게 파열음의 의미였다”(「파열음 속에 아버지가 살아 있다」)라는 구절에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커다란 슬픔이었던가를 실감케 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효과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날 정영숙 시인의 “파열음”은 「또 봄날이 와도」의 랑그와 파롤을 거느린다. 사회의 근본축인 가족애를 시화함으로써 자칫 개인사에 머무를 수 있는 주제를 인간의 본질과 비극미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정영숙 시인만의 보람이 아니라 외할머니와 어머니, 형제자매와 자녀, 나아가서는 친지와 이웃에게도 등불을 밝혀준 결과이다.
천보산 한자락/하늘이 닿일 듯한 높은 산꼭대기/들꽃 하얗게 나부끼는 곳/慶州 金氏 데레사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뉘이시고, 물가로 이끄시니.”
-「비석-어머니5」부분
부모를 여의면 산기슭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던가. 그러나 시인은 사랑하는 이가 떠나면 산보다 가슴보다 더 깊은 시에 묻는다. 독자들은 그 시의 행간에서 슬픔 간수법을 유추하고, 격조했던 문우들은 안부를 확인하며 제각각 자신의 아픔과 맞닥뜨린다. 고독한 삶을 마감한 어머니(고이 잠드소서!)와의 작별 앞에서 저자는 영원한 아픔을 하늘에 적었다. 원고지는 시인의 하늘이니 그 구름 속 말고 어디에 비문을 새긴단 말인가. 『하늘새』 제2부에서 저자는 추모시 5편으로 다하지 못한 매김소리를 내포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해외여행길에 올랐다. 이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지붕 밑도 아니고 병원도 아닌, 높맑은 하늘과 청랑한 바람결이라고 헤아렸던 것일까.
노래 소리에 내 손가락에 감긴 실 스르르 풀리고 올리브 나무 가지 위 금빛 실로 엮어진 새 한 마리 갈대빛 파피루스에 그려지네요 카르낙 신전 성벽에 부조된 삼천 년 전 올리브 나무 위에 앉아 ‘카르낙 카르낙’ 노래 부르던 꽁지 아름다운 새, 그 새가 바로 당신이었나요
-「카르낙 카르낙」부분
그의 몸속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막 피어나는 푸른 꽃봉오리가 불멸이라는 것을 안다/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은/10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서 만나는 옆얼굴/그의 심장 한복판 깊숙이 들어앉은 지성소/촛불의 그림자를 등지고 돌바닥에 무릎 꿇고/겨우 한 장, 불멸의 꽃잎을 만질 수 있었던가
-「앙코르와트」부분
그녀는 도처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삼라만상 어디든 어머니의 영혼이 깃들지 않은 곳이란 없었다. 앉거나 걷거나 발 닿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이었다. 다시 기도하고… 다시 가다듬고… 다시 일어서고… 본래 자리인 일상으로 돌아와 『하늘새』를 펴냈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전적으로 추모시집인 것은 아니다. 실생활이 수렴된 작품을 다수 배치하여 적절한 변화와 비전을 에둘렀다. 정영숙 시인은 1993년에 낸 시집『숲은 그대를 부르리』 이후 『지상의 한 잎 사랑』, 『물 속의 사원』, 『옹딘느의 집』을 간행했다. 특히 이번 시집 『하늘새』에는 자신이 직접 쓴 해설과 연보*를 곁들였다. 그 세세한 문향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모습을 좀더 가까이 줌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일지 모르지만, 정영숙 시인은 시뿐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 그룹전을 여는가 하면 문예지 여기저기에 명화감상 연재를 맡아 쓴 적도 있다. 그녀는 이제 지상에서의 오랜 탯줄이 완전히 잘린 자로서 남은 시간을 새롭게 밀고 나가야 한다. 『하늘새』에 이어 어떤 언어들을 열어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이 자리를 빌어 이미 쌓은 문학적 성과에 송무백열(松茂栢悅)의 뜻을 전하면서…. 잊히지 않는 그녀의 90년대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그때부터 나는 새벽 가을 강가에 서면/은어빛 물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 덩어리의 방짜놋쇠를 만나곤 한다(「견진성사, 그 이후」). 수면 아래 가라앉은 하늘과 물결을 한 덩어리의 방짜놋쇠로 구워낼 수 있는 시인! 참으로 치열하고 여유롭고 청징하지 아니한가.
*황금알 시인선 컨셉트
**『애지』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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