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이나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문학세계사)>
진솔한 일상의 궤적을 문향으로
정숙자
예술이란 앞질러 보여주는 거울이다. 누군가 최초의 기표를 담아냈을 때 감상자들은 경이로써 인식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의 장르가 설령 언어예술이 아닌 음악/미술이라 할지라도 리듬, 또는 색채와 선이 내포한 영토는 언표를 바꾸어 표현한 기의이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개개인의 눈과 귀, 의미를 확장시킨 작품들은 그대로 고정불변의 유기체가 되어 역사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작품만이 호흡이며 혈맥이고 비전이다. 그렇다면 앞질러 보여주는 그 요상한 거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제시한 ‘알렙(Aleph)’을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발견해야 할까. 어둠과 고통을 상징하는 열아홉 계단을 내려가 기진맥진, 혹은 좌절을 앓는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야만 만날 수 있는 꼬리별일까. 여타의 비참한 상황 하에서도 냉철한 이성으로 초점을 맞춘 다음이라야 모습을 드러내는 想像球! 그 신성한 눈은 도대체 어떤 기류를 싸고도는 응화일까.
마음 ‘심心’ 자 한자 위에 떠 있는 팔만대장경이 마음을 들어내자 가볍게 사라진다 행방이 묘연하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던 팔만 지옥의 근심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달겨드는, 백지 한 장의,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인,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했던가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루가 이틀이 한 달이 무심히 건너간다 까맣게 꿈을 잊고 있다가 보면 뜬금없이 우주 저쪽에서 모르스 부호가 울릴지도 모르지 마음 ‘심心’ 자 한자 위에 다시 세운 팔만대장경이 기우뚱 오후 두시로 기울어져 있다
-「팔만대장경」전문
시를 쓰는 행위가 바위의 무게를 깃털 하나로 압축하는 일이라는 얘기는 문학수업 초입에서 익힌 에피그램이다. 위의 시 「팔만대장경」은 한이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의 상륜부에 놓이는 수작이다. 이 시는 일체의 의장을 제하고 곧바로 ‘의식의 흐름’을 표상한다. 어디어디를 …갔다든지, 무엇무엇을 …보았다든지, 이러쿵저러쿵 …들었다는 식의 주변현상이 완전 배제된, 본성 자체만을 모티프로 삼은 관념시의 전범이다. 마음과 시간의 흐름만이 비백체로 그려졌을 뿐, 이 시의 어디에서도 외부적 상황이 포착되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넓어진 자아의 정관이며, 비워진 단계에서만이 인화해낼 수 있는 해저 풍경이다. 팔만대장경이 마음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마음 심心 자 한자 위에 떠 있”다든가 “마음을 들어내자 가볍게 사라진다”라고 돌려 칠 수 있는 필치는 흔치 않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최후의 인간은 자기를 비운 자이다. 부처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라고 사유했다. 한이나 시인 역시 찰나적으로나마 그 붓다를 자기 안에서 조우했음을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 특히 절묘했던 점은 “모르스 부호”라는 테크놀로지 용어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우주, 팔만대장경, 마음心, 근심, 백지” 등 다소 구태에 머물 수도 있는 언어군이 일거에 환기되었다. 그리하여 공간과 시대를 압축시킨 성과, 즉 탄력과 완결성을 획득하였다.
느릿느릿 붓끝에 먹물 묻혀 사군자를 친다
창호지에 새벽 푸르름이 묻어올 때까지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딴 세상
먹참선 대나무 그림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는다
마디마디 나를 느낀다
두루적막 속 먹향기는 멀어질수록 향기롭다
-「먹참선」전문
여기서 화자가 진짜로 화선지를 펴 놓고 먹을 갈아 사군자를 쳤느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문 자체가 수묵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므로. 화자는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해 “새벽 푸르름이 묻어올 때까지/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하나 채워”갔으며,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었을 터이다. 뿐일까, “두루적막 속 향기는 멀어질수록 향기롭다”라고까지 전진하였다. 향기가 엷어진다거나 희미해진다는 표현 대신 “멀어질수록”이라고… 게다가 “멀어질수록 향기롭다”고까지, 급회전적 발언을 잇달아 구사함으로써 격조 높은 문장을 이루어냈다.
나 죽어 천장을 해도 탓하지 않으리/ 야크 뿔이 얹혀 있는 표지석을 지나/ 낭떠러지 벼랑길 드리궁 틸 티벳 사원/ 그 천장터에서/ 천장사의 망자를 위한 노래 마지막으로 들으리/ 유복녀 쓸쓸하고 적막했던 한 시절을 되감아 보는/ 실타래의 길은 멀다/ 느슨하지 않게 늘 실을 팽팽하게 당겨 잡아야 했던,/ 고단을 풀고 이제 나 즐거이 손을 놓아도 근심이 없으리/ 하늘을 까맣게 덮고 연처럼 날아오르는 독수리 떼의 비행/ 고요히 담담하게 바라보며/ 나의 살점과 뼈와 두개골을 부수어/ 날짐승에게 땅에게 온전히 나누어 주어도 아깝지 않으리/ 살아 있는 것이란 한갓 고깃덩이에 불과한 것/ 그래도 즐겁고 행복하였노라 삶이여/ 가장 빠르고 깨끗하게 마지막을 정리하여/ 내 영혼 독수리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리/ 울면 더 슬퍼서 안 운다는 라마승의 저 환한 미소를 봐라/ 심장이 터져버릴 듯 숨이 가쁘던 세상의 걸음도/ 여기서는 평화이리니// 나 죽어 천장을 해도 좋으리
-「천장天葬」전문
미셸 푸코는 “인간은 하나의 차원을 지닌 존재 양태이다. 그런데 이 차원은 항상 개방되어, 결코 결정적 한계가 주어지는 법이 없으며, 끊임없이 답사되는 차원이다.(『말과 사물』)”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구태여 인용구를 쓰는 까닭은, 한이나 시인의 이번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에 실린 편편마다 거시적으로는 줄곧 “답사되는 차원”이면서 미시적으로는 “답사되지 않았던 차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세한 설명을 줄이더라도「천장天葬」은 전자와 후자를 동시에 수렴한 문향임에 틀림없다. 움퍽짐퍽하지 않은, 고르게 다듬어진 작품들이 그녀의 <次元構築>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글에서 텍스트로 뽑은 심연 위주의 시 말고도 「가시」「어머니와 재봉틀」「다비多毘․2」등 화자의 전 인생을 담아낸 가편들이 심도와 밀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한이나 시인의 정점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져온 궤적을 기반으로 좀더 독창적이고도 획기적인 진경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우리의 ‘알렙’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지 않고, 어느 건축물의 기둥에 있지 않으며 각자의 정신 속에 깊숙이 박혀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문우로서『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상재를 각별히 축하하며 환희 또한 함께한다. 아울러, 그녀는 1994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집 『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귀여리 시집』을 펴낸 바 있음을 밝혀둔다.
*『문학과 창작』2007. 겨울호/ 시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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