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013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이화우 좀 보자는데 살이 선뜩 떨려서 몸살약 뒤져보다 빈 약갑을 구기고 널뛰는 잎샘 꽃샘을 갑인 양 흘겨주다 뉘보다 깊이 정든 스마트 체위라고 위문이나 주문할까 폰을 들고 엎드리다 속 모를 흰소리 판에 속이 외려 시린 날 무람없는 톡이며 인증샷 팍팍 지우다 지음이란 너마저! 버리고 돌아서니 꽃 적실 수작酬酌도 없이 마음 머는 소리만 -전문(p. 65) ----------- 호적 결국은 보가 터진 개발지의 형제 필지 호적까지 들먹거린 명절 끝이 파묘라니 그나마 헌 집도 헐고 찬 우물도 꾹 메우고 그런 한때 흘리고 간 대못 같은 뼈 한 편이 선산에 달 좋다고 호적胡笛 찾아 부는지 놓아둔 눈물 고르듯 은하수도 파르라니 -전문(p. 70) ----------------------..

사족/ 정수자

사족 정수자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 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 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 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 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 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전문(p. 24) 해설> 한 문장: 3 · 4조 혹은 4 · 4조가 거의 그대로 지켜지는 이 작품은 바로 그 오래 익숙한 가락 때문에 읽는 순간 이미 절반은 읽는 자의 피부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육화된 가락'이라고 하면 정확할 이 소리는 적어도 한국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에 '사우다드Saudade'라 불리는 포르투갈 고유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시조의 가락엔 한국어 공동체의 오래된 공유 정서가 깔려 있다...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아득한 연결점의 누군가를 허공에서 꺼내본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사람 아버지, 거울 속 나를  뜯어보면서  그 누군가의 성향과 정서와 용모  그 무엇이 그에게서 내게 전해 왔는지  자식에서 자식 다시 자식까지  뿌리를 내려다보며 기질까지 낱낱이  유추해 본다   내 안의 피와 살과 뼈를 준 숫자와 기호들  살아 무성했을 말과 공허했을 몸짓들   전전긍긍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만도 덕분이라고  물결무늬 감정이 레테 강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은총의 실마리를 찾아 간신히 바늘귀에 꿰어놓는다   누구를 닮은 것일까  어떻게'  꽃 한 송이로 피어 있을까  나는     -..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전..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다 외 1편/ 동시영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다 외 1편 동시영 오월, 줄장미가 줄지어 꽃이라는 곳으로 가 보고 있다 해마다 가도 아직 다 못 간 모양이다 담에서 벽으로 끝없는 행렬 길에서 길로, 사람들 줄지어 사람이라는 곳으로 가 보고 있다 목숨은 다, 붉은 장미 다만, 가 보는 곳이다 -전문- ------------- 판화전 인산인해 인사동 네거리 찍고 찍혀 나온 생생한 판화 속 박수근 판화전이 판을 벌였다 '빨래하고' '기름 팔고' '집으로 가고' 판화와 판화 사이 구경하는 나도 판화 서로 봐 주는 판화와 판화 사이 세상은 거대 상설 판화전 판화가 없을 때도 판화는 있었고 복사기가 없을 때도 복사는 있었다 찍고 찍히고 찍어 걸고, 날마다는 나와 발자국으로라도 찍고 봄날은 더욱 판화의 계절 매화, 라이락, 산수유, 매발톱..

오징어/ 동시영

오징어 동시영 몸이 화살표다 어디로 가라는 화살표인가? 온 바다 헤매는 화살표, 따로, 방향할 곳이 없다는 거냐? 사는 건, 그냥, 헤매는 거란 말인가? -전문- 해설> 한 문장: 참으로 유머러스하다. "몸이 화살표"인 오징어에게 화자가 묻는다. "어디로 가라는 화살표인가?" 이것은 삶에 대한 화자의 물음이요, "따로, 방향할 곳이 없다는 거냐?" 이것은 화자 자신의 대답이라고 보아도 된다. 삶에 무슨 필연적인 방향이 있나? "그냥, 헤매는 거" 아니냐. "화살표"인 것 같지만 가리킬 곳이 없다. "온 바다 헤매는 화살표" 이게 우리의 인생 아니냐. (···) 그러니까 이 시집은 방향 모를. "화살표" 없는 바닷속 같은 세상을 바람처럼 멀리, 가까이 떠돌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오늘"을 ..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환자들은 의사에게 한번 잡히면 죽어서야 풀려난다.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내과는 일 년 걸쳐 1번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서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그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5,6년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언 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감격해 아내 이름을 부르며 비..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1. 주마간산은 세월 속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흐르는 파노라마다. 어사화御賜花를 꽂지는 않았지만 말 타고 달리며 산천경개를 대충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겠느냐. 흐르면서 지나치면서 그냥 무심한 듯 본 산이 무위자연으로 있어 부끄러움이 없고 나그네 행색이라도 눈썰미가 있어 산자락을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모실 묫자리로 안성맞춤으로 점찍어 염두에 두었나니. 그냥 바쁘게 무심히 본 것인데 무욕이 되어 삭여서는 마침내는 티를 거른 욕심이 되었다. 저 산을 사서 부모님 묘로 쓰려면 아무래도 수중에 푼돈이라도 챙겨야겠기에 주마가편走馬加鞭하며 하루를 내딛는다. 2. 고향에는 어머니만 계신 게 아니라 오래도록 떨어져 살은 내 짝도 있다. 그런 정을 과거에 묻고 떠돌았다. 날품팔이 같은 인생..

늦은 눈 외 1편/ 이광소

늦은 눈 외 1편 다산초당에서 이광소 쫓긴 듯 내려온 곳 강진 도암 땅에 한 자字 두 자字 눈이 내리네 어제도 기다리고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 알았다는 듯 한 줄 두 줄 눈이 내리네 늦어서 급히 서둘렀다는 듯 지붕에도 나뭇가지에도 다섯 줄 여섯 줄 내리네 반가워서 뜰에 나가 손을 흔드니 그래, 알았다는 듯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내리네 기쁜 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새로운 소식 기다렸던 다산도 이렇게 들뜬 마음이었을까 살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눈물이 앞을 가려 뒤뜰 연지못으로 돌아가 보니 밤새 몰래 내린 두꺼운 얼음책이 있네 녹지 않은 소식은 얼마나 달콤한지 비바림 속을 견뎌온 정든 나무들은 다산 유배되어 있을 때 경소리 들은 듯 야윈 가지 초당을 향해 굽어 있네 시린 겨울밤 내내 목민심서를 쓰던 ..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안과병원 수술실에서 레이저 불빛을 바라본다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세 개의 행성이 덮쳐오고 있다 내 유년 시절의 회전목마를 불태우고 내 청년 시절 독서실을 불태우며 내 전 생애를 달리던 도로의 가로수들을 불태우는 동안 의사는 수정체를 빼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한다 아, 사라진 내 눈의 고유성 만약에 관절마저 인공관절로 대체한다면 심장마저 인공심장으로 대체한다면 항문마저 인공항문으로 대체한다면 나는 안드로이드가 되는 것일까 아직도 보이는 세계에 대한 미련이 강해 백내장 수술실에 누워 있지만 언제쯤 눈을 감고서도 보이지 않은 세계를 볼 수 있을까 눈은 있지만 정신맹이 있듯이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고 살아온 생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은 어둠 속으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