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013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담요처럼 쓸쓸함을 덮어쓰고 땡볕의 가로수 길을 걸었다   땡볕도 가로수 잎도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사실은 손발이 시린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몸이 안 좋은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땡볕의 가로수 길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이 가까워졌다   외로움은 기체여서 속속들이 스몄다   외로움은 액체여서 계속 번져나갔다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걸을 힘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라 해도   그것만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영영 ..

대유목 시대/ 한명희

대유목 시대      한명희    나의 땅이 아니니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의 대통령이 아니니  투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한다지만  나의 신이 아니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국경 근처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합니다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방향을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유목민이고요   그들을 따라  핸드폰과 노트북을 챙깁니다   어디까지든 가볼 참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제목인 "대유목 시대"는 '디지털 노마드'를 지칭하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이버 세계에서는 국가가 지배하는 영토도 없고 신을 모셔야 할 사원도 없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유로운 세계를 항해한다. 시인이 "투표하지 않"고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이상해요  여기는 전부 한국사람뿐이고  모두들 우리말만 해요  그런데요 그냥 좋아요   초등학교 1학년 마치고  주재원으로 온 가족이 독일 가서  이제, 6학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손녀가 공항에서  도착과 동시에 온 전화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는 나라들 생각할 때  우리나라는 천국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는 나라  그럼 좋을 수밖에.     -전문(p. 37)       ----------------------     빼앗긴 날들    계절을 잊은 하루들  안갯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벽 아닌 벽에 막혀 버린 길  스쳐가는 바람이 세상을 조롱하고  흐르는 공허한 마음과  막연한 다짐이,  지난 계절..

잔디/ 백성일

잔디     백성일    살다가 보니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인다  얼굴에 윤기가 나고 좀 살만하면  누군가 사정없이 허리 부러뜨린다  수없이 당하고 원망과 불평도 했지만  하늘에 주먹질이다  죽은 듯이 참고 삭이고  사나흘 지나면 허리 틍증도 사라진다  어제를 잊어버리고,  서로 끌어안고 몸과 마음도 하나로  얽히고설키고 사랑하면서 하늘 본다  전설의 가훈은  절대로 하늘로 머리 쳐들지 마라  그저 핏줄끼리 서로 한 몸 되어  땅만 보고 살아라 하셨다  땅에 엎드려 죽은 듯이 숨죽이고  오늘도 무르팍 까지도록 기어간다  그래도 땅은 넓다     -전문-   시인의 말> 전문: 게으른 놈이 게으른 놈을 보고/ 참으로 게으르구나 하고 나무란다.// 우여곡절 끝에 6년 만에 3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을 보러 갔다   꽃나무는 눈을 내리감고 제 발등에 펼쳐진 고요를 보고 있었다   한 걸음 꽃그늘을 디딜 때마다 붉은 고요가 피었다가 사그라졌다   꽃을 밟고는 못 건너가겠다고 딸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꽃송이를 하나하나 주워 올렸다    꽃을 올린 두 손바닥은 오므린 꽃잎이 막 벌어지는 꽃 한 송이   꽃향기가 손금을 따라 붉게 번지고 고이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시간이 고요 속에 앉고   바닥도 없이 층층이 바닥이었던 나의 붉은 시간도 앉아  웃음도 뎅컹, 울음도 뎅컹,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송이를 주워 들었다   눈부신 바닥의 암흑만을 딸에게 주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데    밟을 수 없는 꽃송이 하나하..

둥근 자세/ 강미정

둥근 자세      강미정    둥글게 스민다는 말이  소리 없이 울고 싶은 자세라는 걸 바다에 와서 알았다  둥근 수평선, 모래에 발을 묻고 흐느끼다 스미는 둥근 파도,  나는 왜 당신의 반대편으로만 자꾸 스몄을까  내 반대편에서 당신은 왜 그토록 둥글게  나에게로만 빗물 보내왔을까  파도가 대신 울어주는 바닷가에서  둥글게 스민다는 말이 혼자 우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대신하여 울던 당신이  어두운 곳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오래오래 혼자 울던 당신이  이른 저녁 눈썹달로 떴다 울고 싶은 자세로 웅크려 떴다  세상은 울고 싶은 자세로 몸을 웅크리다가 둥글어졌을 것이다  수평선이 저렇게 둥근 것처럼  나를 비추던 울음도, 나에게 스미던 당신도 수평선처럼 둥근 자세였다  모두 멀리 떨어져야 잘 볼 ..

무거운 작심 외 1편/ 강빛나

무거운 작심 외 1편     강빛나    바다 혼자 엄마를 지키게 놔둘 순 없어  CCTV를 설치했다   바람에 넘어질지 몰라요  이른 봄 밑이 미끄러우니 우리 삼 남매가 수시로 볼게요   한두 달은 핸드폰에 지문이 쌓이도록,  개불 구멍 찾아 집게손가락 후비듯이  고향 집 문턱을 드나들다가   이내 집안 가득 봄을 들여놓고는  분홍 바람 날리는 언덕을 지키느라  엄마를 까맣게 잊었다  오빠도 남동생도 저만치 꽃구경 속에 서 있었다   CCTV는 24시간 저 혼자 엄마를 기키겠지  행동 굼뜬 독거노인 돌봄이라는 명분을 걸고  사방 넓은 화각으로 자식보다 열심히  움직임을 감지하겠지   자식들의 생각은 그저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개뿔!   속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한번 쳐다보고 씩 웃었을 엄마,  가는 ..

문어+해설/ 강빛나

문어     강빛나    내 높은 지능이 연체동물 중 최고라고 했다   머리만 좋을 뿐 나는 천애고아다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사는 습성 탓으로  겨울 바다 밑바닥을 헤매며 바닥의 맛을 너무 일찍 알았다   가끔 어른들은 집안을 봐야 그 사람을 안다고 했다 먹물을 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웃는 연습을 했다   그들은 나를 바다의 현자라 불렀지만 바다에서 훨훨 떠도는 무념은 알지 못했다   먹고사는 일에는 몸 쓰는 것이 중요해서 발바닥부터 아려왔다  바위에 함께 몸 비빌 형제 하나 없이 홀로 선다는 것   뼈대 없는 가문이란 것이  마땅히 후광 받을 곳이 없다는 것이  눈시울을 이렇게 붉히는 일인 줄 몰랐다   짧게 살더라도  한 번 눈멀었던 내 사랑 지워지지 않도록   文魚가 文語로 바뀔..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왼쪽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딸아이가 돌아왔다   웃다가 들킨 낮달 혼자만 바깥에 세워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도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던 울음을 낚아채고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마늘을 까거나 알밤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날개가 없었지만 자주 모여 밥을 비벼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말들이 귀신처럼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온 여름 혈서만 쓰다가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

이월/ 박숙경

이월      박숙경    청머리오리 수컷이 물속으로 부리를 꽂고 궁둥이를 치켜든다  앞발은 물속을 뒷발로는 바깥을 휘젓는다   artistic swimming  허공이 잠시 흔들린다   한 바퀴 돌 때마다 태어나는 파문의 자세는  butterfly   아름답다, 라는 말은 절실한 순간에 태어난다   돌 위에서 볕을 쬐던 흐린 갈색의 암컷이 뛰어든다  솔로에서 듀엣으로 종목이 바뀐다   바람의 노래는 크레셴도 데크레셴도  우아함을 유지하면서 점점 난이도를 높인다   우수雨水 근방에서 물구나무선 저들의 자세  간절함이 자라면 경건함이 될까   살얼음판 위에 벗어둔 하루 위로 고단한 바람이 지나간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밖은 눈이 오면서 쌓였던 눈을 지운다. 산중의 봄은 이렇게 당황스러운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