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013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수레바퀴처럼 늘어선 국화 다발 속  조문객이 꽃길을 내고 있다   태극기 휘장 고이 덮고  아버지는 96세 일기로 영면하셨다  장기 전투 승리로 이끈 역전의 장수將帥처럼  한 세기 전투 마치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 건너셨다   엄마는 혼잣말로  사람 팔자는 관뚜껑 열어봐야 알 수 있다 했다  이승에서 자식들과 마지막 인사 나누고  관 모서리 이해되는 어머니의 말   "칠 남매 자식 앞세우지 않고  배웅해 주는 아내도 있으니  젊은 날 목숨 바쳐 나라에 충성했고  자식들 모자람 없이 키웠으니  이만하면 됐소, 암 됐고말고"   젊은 날, 자랑 같아  전봇대에 대고 귀엣말로 속삭였다는 엄마  금실 좋았던 남편 별 탈 없는 자식 자랑 들으면 ..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하늘길  닿을 듯 말 듯   사막 건너온 늙은 낙타  모래 위에 무릎 꺾고 누워 있다  눈꺼풀조차 무거운 듯 실눈 겨우 뜨고  새끼 발소리에 귀 세우고 있다   낙타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  잠깐 머무는 사람의 온기  너무 아쉽고 목말라   혹여 잠든 새 떠날까 봐  잠들지도 못한다   누워 있어도 힘이 센 엄마  딸자식 발목을 묶어 놓았는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다   오늘도  하늘에서 보낸 청첩 마다하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낙타     -전문-    해설> 한 문장: "낙타의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는 고백이 눈물겹다. 엄마는 오늘 하룻밤 잠깐 머무는 자식의 온기가 "너무 아쉽고 목"마른 모양인데 혹시 "잠든 새"에 사..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마지막 외 1편     이향아    바람도 없는데 집안은 한기로 출렁거렸습니다. 막힌 줄도 몰랐던 파이프에서 새어 나온 절규, 죽음을 이기려는 마지막 숨소리, 다시는 당신의 더운 이마를 짚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편찮으세요"   말로 통할 수 없는 고통이라니!  허망이란 최후에 남아 있는 침묵  당신이 벼르고 벼르다가 때를 골라서  광풍을 한바탕 휘몰고 가신 후에야  붉은 피를 닦아내며 깨우쳤습니다   뿌리째 뽑혀서 흔들리지 않을 때야, 당신이 뒤척이던 처절한 손짓이, 참으려고 악물었던 마디마디 숨소리가, 마지막을 알리는 웅변이었다는 것을    -전문(p. 87)      ------------------------------------------    바다가 보이는 풀밭교실    그해 여..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이향아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이향아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날마다 양재천변 둑길을 걸었던 것은  모감주나무를 만나고 싶어서였네  비탈에서 가지 뻗어 금빛 꽃을 피워 올리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연두색 주머니에  먹구슬 같은 염주알이 나날이 익어가면  내 가슴도 터질 듯이 차 올랐었네  "무슨 나무지요?"  걷다가 멈춰 나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지나던 사람들이 내 곁에 모여들고  나는 기쁜 듯이 대답했어  "모감주나무예요"  내가 심어 기른 듯이 뽐내면서  내 나무라도 되는 듯이 자랑스럽게  그와 아주 친한 듯이 다가서면서   재작년 폭우로 무너진 둑은 검은 뻘밭이었어  관청에서 수해 보상금을 청구하라고 할 때  눈만 뜨면 이런저런 탓들만 칡넝쿨처럼 뒤엉키고  모감주나무는 비에..

세포가 기억하는 잠버릇 외 1편/ 김추인

세포가 기억하는 잠버릇 외 1편         homo           김추인    새도 외로울 땐  부리를 날갯죽지 속에 묻어 어미의 심장박동 같은 제 심장 소리에 잠이 든다지   내가 잠을 부를 땐   혼자의 잠, 제 오른 손을 베고 왼손을 둘러 목을 감싸 안아야만 잠이 살글살금 눈꺼풀로 내려온다는 것도  나만 아는 사실   내 잠을 부르는 백색소음, 철썩이는 파도소리도 어린 날바닷가의 잠을 기억하는 탓이지     -전문(p. 44)       ------------    인류세*        homo consumus    사람 여러분  인간의 힘은 모든 종種을 휘하에 두고 호령합니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애  인간의 방식으로   한때, 야생의 날지도 못하는 새,  붉은 들닭이던 우리는  인류세..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김추인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Homo evolutis      김추인    자코메티의 남자,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보폭  무릎 끓을 수 없는 긴 다리,  허허 빈 천공을 뚫어낼 듯   육십 년을 내내 걷고 있다  숱한 문짝들을 지나  암흑물질과 광자들 지나 양자의 물결 속을 걸어가고 있다  소립자들의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고 아직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지평선 저 너머를  별들의 저 너머를 응시하며 걷고 걷는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쉿! 비밀 하나, 남자의 닉네임은 '보이저'라고도 하는데)   새 천년의 무탄트, 암호를 풀다  기사 한 토막 없었지만  화성, 목성을 지나 토성을, 해왕성의 고리를 곁 보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 태양계 바깥, 오르트 구..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좌표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더 많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새날의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듯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모든 저녁은 목초지에서 돌아온다  빈방 가득 빛이 없는 연료들  이불 속에 가득 찬 실뭉치에  따듯한 말이 들어 있긴 할까   양 떼는 웅성거리는 밤에 자라서  등과 불룩한 배는 누구의 몸 치수를 재는지   길게 풀어져 나온 실뭉치들로  엉킨 저녁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서로의 얼굴에서 터진 솔기 같은 표정이 적힌다   바깥과 안쪽 모서리에 상처가 난다  저녁을 다 감기 전에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고  풀밭에 떠도는 말을 양 떼가 몰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  양 떼의 울음으로 실은 풀어지고 초식동물의 잠은 감긴다   입구를 흔들면 저녁이 짧아진 양 떼들이..

춘몽인화(春夢印畵) 외 1편/ 송뽈깡

춘몽인화春夢印畵 외 1편 송뽈깡 또 번지는 아지랑이. 벌리는 입술이 떨리네. 추억은 저절로 피어나는 것 잔잔한 불꽃이네. 그 미소 사진 한 컷 접지 않는 날개에 걸어두리라. 춘풍이란 셔터 누르며 벌이 윙윙거리면 용용한 봉오리 안에서 은근히 곰곰 웅크려대기만 하던 목련꽃잎이 밖으로 조심스레 너울거리네. 마주친 눈빛 위해 더욱이 부드럽게 펄럭여대는 이 아지랑이는 얇은 플레어스커트 자락의 우아한 흐느적거림이네. 심연이 떨리네. 지상의 모든 설렘이 그리 재발하고 시간은 더불어 노 젓게 되네. 흐드러지게 유희할 순筍 붕붕거려대는 15개 입춘으로부터 던져진 소년이여. 끈적하게 팔짱 껴대는 꽃잎 미소 25개 봄으로 진수한 나룻배에 싣고 소녀가 흐르네. 만연하게 춘풍이 부네. 더더욱 두근대는 이 에스프레시보 그리움은 ..

그 새는 새장이 구워준 빵으로 일생을 산다/ 송뽈깡

그 새는 새장이 구워준 빵으로 일생을 산다 송뽈깡 여러모로 날개여, 거뜬히 날아다닐 자작곡 걸쳤는가. 밖으로 나도는 음악이 새장을 소환하자 비상 길쌈해대는 새소리가 솟는다. 이때 길이 지휘해줄 터. 깃털 선언한 음표들이 흐른다. 운명이여, 바람으로부터 태어난 노래와 놀아날 일이다. 캄캄할수록 더 환해지는 법 그 길 쫓는 눈빛에서 발화해 솟은 등불 태우며 저를 가둔 새장 팔아, 활활 날개 사 먹는 새 말이다. -전문- 에필로그(저자) 상처가 큼큼거리고 눈물이 뚜벅거리는 이유 나 내 운명을 외상해버렸듯 이 시집은 해설을 달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허한 것같이 나는 내가 시 쓰는 것 태초에 허락했기 때문이다. 냉큼 사로잡힐 줄 아는 느낌의 주인들이여. 감히 내 상처가 감동의 시간을 선포한다. 그로 말미암아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