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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 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신호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

친구 외 1편/ 박순원

친구 외 1편       박순원    국민학교 4학년 때 조용하고 조그맣고 깡마르고 빡빡머리에 꼬지지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끼리 몇 명 머리를 맞대고 조용조용 킥킥거리며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다가와 그 친구에게 아버지 뭐 하시냐고 친구는 그냥 웃기만 했다 농담처럼 묻던 선생님이 재차 묻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는데도 웃기만 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묻자 웃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두드려 패면서 물었다 맞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두드려 패다가 선생님의 분이 안 풀려 식식거리고 있는데 들릴각 말락 입술만 달싹달싹 똥구르마 끌어요      -전문(p. 13)     --------------     깅아지   내가 깅아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뜻 내가 'ㅏ'발음을 못 하는 줄 알았다가 가운데 '아..

랄/ 박순원

랄     박순원    발랄의 랄과 지랄의 랄이  서로 만나서 지랄의 랄이   반갑다 우리는 같은 랄이야   발랄의 랄이 발끈한다   랄이라고 다 같은 랄이 아냐  나는 剌이야 潑剌 분별 좀 해 분별  내 옆구리에 칼 안 보여?  조선 시대 같았으면 넌 죽었어   시대가 바뀌었어 네가 剌인 줄  누가 아냐? 다 랄이지 이제는  그냥 다 랄이야   네 눈엔 안 보이지만 내 속엔  아직 칼 들었어 조심해   다 녹슬어서 들지도 않는  칼 가지고 폼 잡지 마 너만 다쳐  그냥 발랄하게 살아   나는 누가 뭐래도 剌이야  당분간 발랄한 척하고 있지만  언젠가 칼을 쓸 날이 올 거야 그땐  네 관절 마디마디가 온전치  못할 거야 온전치  못할 거야 조심해   그래 그럼 나야 껍데기나 속이나  뒤집고 흔들어 봐야 ..

백조의 나날들__ 욕조를 채우는 눈물 외 2편/ 박찬일

백조의 나날들__욕조를 채우는 눈물 외 2편    박찬일  빈터를 채우려 했나? 빈 터를 보여주려 한 것 생상스를 상크트 상크트로 읽으며 vacant vacant 하며 백조 백조로 덮으려 했네. 죽음의 천사인 것   죽음의 백조인 것  맨 나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머니와 함께한 사진, 어머니는 어느 장로님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엉뚱한 사진, 그로테스크의 두 가지 뜻 중에 코믹성이었네좌측에 서 계신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환경관리공단 본부장, 나는 그들을 채근했네, 봐 봐 어머니야, 울음을 터트린 듯.궁금한 것은 집 안에 들인 커다란 나무, 기둥과 큰 가지 주위를 시멘트가 꽁꽁 싸맸네. 오전 11시에 해가 들어오는 곳. 사진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일회용 커피 막대까지, 표지가 썩은 영한사전 푸른 곰팡이가..

카테고리 없음 2024.11.10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어느 행성의 암석에 박힌 말, 기쁨만 갖고 하루종일 어떻게 사나? 슬픔만 갖고는 살 수 있어도 기쁨만으로는 살 수 없어 기쁨 다음에 찰나랄 것도 없이 비애가 덮치기에 기쁨이 총회를 개최하지 않는 걸까기쁨의 총회에 초대받지 못한다, 초대받더라도 갔을까.아 기쁨의 총회가 없어진 지 오래 너는 왜 그러나 기쁨을 축하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다. 눈발을 걷는 저 사내의 힘찬 팔에 휘둘리지 않으면 기만이다 기쁨의 총회는 열리지 않는다. 눈발을 힘차게 걷는 저 사내도 곧 보이지 않는다 기쁨은 없다. 혹시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한 번만 한 번만 기쁨이 오면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수없이 결정 결정했어도 너는 기쁨을 차버리고 비애로 갔네. 비애가 너의 집이다. 기분이 전부일지 모르고 하나..

박판식_이 적은 보물 주머니/ 繡(수)의 秘密(비밀) : 한용운

繡수의 秘密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옷을 다지어노앗슴니다  심의도지코 도포도지코 자리옷도지엇슴니다  지치지아니한것은 적은주머니에 수놋는것뿐임니다   그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만히무덧슴니다   짓다가노아두고 짓다가노아두고한 까닭임니다  다른사람들은 나의바느질솜씨가 업는줄로 알지마는 그러한비밀은 나밧게는 아는 사람이 업슴니다  나는 마음이 압흐고쓰린때에 주머니에 수를노흐랴면 나의마음은 수놋는금실을따러서 바늘구녕으로 드러가고 주머니속에서 맑은노래가 나와서 나의마음이됨니다  그러고 아즉 이세상에는 그주머니에널만한 무슨보물이 업슴니다  이적은주머니는 지키시려서 지치못하는것이 아니라 지코십허서 다지치안흔것임니다    -전문-    * 블로그註:  '때' , '까', '따,의 옛 훈민정음체 쌍자음을 쓰지 못..

향기로운 삶/ 홍성운

향기로운 삶      홍성훈/ 아동문학가     어느 날 돼지가 젖소를 보고 불평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머리부터 발, 그리고 피부 껍질까지 모두 주며, 머리는 고사상에 올라 사람들의 복도 빌어주는데, 왜 사람들은 너를 더 높이 평가하는지 모르겠어."  돼지의 말에 젖소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너는 죽은 후에 머리부터 발까지 모든 것을 내어 준다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들이 건강하도록 내 몸의 우유를 기꺼이 짜서 내어주고 죽은 후에도 아낌없이 다 주거든."  그렇다. 살아서 더 가지려 더 움켜쥐려 욕심내며 살아온 삶이 죽은 다음에 다 준다고 해야 모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나눌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내 것을 줄..

권두언 2024.11.0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부끄러움은 많고 자랑은 적었습니다. 지금껏 살았다는 건 순ᄀᆞᆫ순ᄀᆞᆫ 먹었다는 것. ‘생각’이라는 동굴에 들어 사유思惟를 캐면서부터···, 플랑크톤처럼 작고 짧은 생이기를 원했지마는 제 몸은 먹이>가 아닌 먹기>였던 것입니다. (1991. 1. 16.)                다시 밤   낮 동안 부풀었던 침전물이  가라앉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밤  고요, 황홀, 조금은 쓸쓸하기도 ᄒᆞᆫ  이 은은함은   어릴 적 사랑했던 뮤즈의 슬ᄒᆞ   오로지 그뿐, 여위는 가을    -전문(p. 90-91)   ------------- * 『시사사』 2024-가을(119)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3      정숙자   부끄러움은 많고 자랑은 적었습니다. 지금껏 살았다는 건 순ᄀᆞᆫ순ᄀᆞᆫ 먹었다는 것. ‘생각’이라는 동굴에 들어 사유思惟를 캐면서부터···, 플랑크톤처럼 작고 짧은 생이기를 원했지마는 제 몸은 먹이>가 아닌 먹기>였던 것입니다. (1991. 1. 16.)                다시 밤   낮 동안 부풀었던 침전물이   가라앉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밤  고요, 황홀, 조금은 쓸쓸하기도 ᄒᆞᆫ   이 은은함은   어릴 적 사랑했던 뮤즈의 슬ᄒᆞ   오로지 그뿐, 여위는 가을     -전문(p. 90-91)  ------------- * 『시사사』 2024-가을(119)호 에서*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10시 15분/ 김대선

10시 15분      김대선    서쪽에 산다는 바람 하나  제비꽃 씨앗 물고 와  가슴 모퉁이에 슬며시 밀어 놓았다  씨앗을 보지 못한 나는 멈출 줄 모르는 시간만 바라보았다  매일 같은 시각에 바람은  싹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물을 흘려보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린 흔적  봉오리가 맺힐 때 눈을 비비면서  문득 꽃의 미소를 보고 말았다   흙의 장난에  가슴은 엉망이 되기도 하지만  제비꽃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오늘도  그 시각 서쪽을 향하고  바람은 어김없이  빛과 물을 물고 찾아온다   기다림은 기린의 목이 되어간다     -전문(p. 203)* 추천의 말/ 사물에 침투하는 시력이 마우 섬세하다. 오랜 시간 시적 안테나를 갈고닦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작은 사물에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