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문/ 최은묵 땅의 문 최은묵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 숨, 대개 이런.. 잡지에서 읽은 시 2013.12.01
사행천/ 홍일표 사행천 홍일표 뱀이 남긴 것은 밀애의 흔적입니다 어디에 가도 꽃의 언저리를 감도는 붉은 숨결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한 마 리 뱀으로 당신을 휘감습니다 가끔 반짝이는 웃음소리에 돌들이 물방울처 럼 튀어 오르고 나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만조의 바.. 잡지에서 읽은 시 2013.12.01
노역/ 오세영 노역 오세영 소음이 아니다. 한밤중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홀로 문득 깨어나 귀 기울여 보아라. 적막 속에서 벽시계 꼴딱꼴딱, 냉장고 그렁그렁, 웅얼대며 뒤척이는 에어컨, 수도꼭지 똑똑 코피 흘리는 소리, 세상은 온통 신음으로 가득 찼나니. 어쩌다 인간에게 붙들려 이리 잘리고.. 잡지에서 읽은 시 2013.08.18
나무시화전/ 문정영 나무시화전 문정영 조계사 경내 나무시화전을 한다. 봄나무들이 햇빛으로 쓴 글자들은 촘촘하여 불안을 지우고 불안의 바깥을 쓴 것 같다. 생의 증표를 만년필촉처럼 세웠던 이들도 뚜렷하 게 변모한 글씨체를 묻는다. 바람이 허공을 지워 어떤 인연에 초록 잉 크를 번지게 한다. 그림자.. 잡지에서 읽은 시 2013.08.17
평원의 밤/ 이재훈 평원의 밤 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 잡지에서 읽은 시 2013.08.10
慈悲/ 강운자 慈悲 강운자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파리 떼가 웽웽거리고 구더기가 썩어가는 몸을 파먹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찬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았지만 불발이었다 다시 하나를 뽑았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우리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군한테 .. 잡지에서 읽은 시 2012.09.23
지포라이터를 켜며/ 김종철 지포라이터를 켜며 김종철 형이 면회를 왔다 떡과 통닭 한 꾸러미에 눈물 핑 돌았지만 이내 담배를 물었다 번쩍이는 지포라이터로 불붙여 주었다 쉬엄쉬엄 세상 소식 전하던 형은 지포라이터를 봉화로 켜 올리며 활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고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은빛 날개 같은 생.. 잡지에서 읽은 시 2012.09.14
부채를 부치며/ 장충열 부채를 부치며 장충열 푸른 바람에로의 이동- 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더위를 힘껏 밀어낸다 묵향을 따라 주름살 펼쳐 대숲을 달린다 추상명령 같은 옛 시인의 궁서체가 눈앞에 죽창으로 꽂힌다 순간, 생각의 끝을 깨우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어릴 적, 외가 뒤란에 키 작.. 잡지에서 읽은 시 2012.09.14
당신의 고비/ 박영민 당신의 고비 박영민 이 고비를 넘으면 모든 고비도 끝날 것이라는 게르 위로 끝없이 펼쳐지는 또 다른 고비 씨앗들이 발아한 적 있다는 수상한 사막, 물기를 다 거둬간 태양의 이면으로 흑인 예수가 옆으로 길게 눕는다 검은 신기루! 굴절되는 순간 사다리를 삼키고 자꾸 길어지는 팔과 .. 잡지에서 읽은 시 2012.09.13
삐라 2/ 채선 삐라 2 -부르지 못하는 노래 채선 나는, 핏속에 울음을 가둔 벙어리로 태어났다. -아직 다 울지 못한 새벽이 있거든 맘껏 울어주리- 해마다 봄은 미리 죽거나 시들해졌다. 몹쓸 병에 걸린 시절, 철 이른 꽃들 노랗게 흔들리고 계절 밖에서 떠도는 소문 같은 푸른 안개 떼 지어 강가로 몰려다.. 잡지에서 읽은 시 2012.09.13